다음날 아침, 몸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다. 간밤에 잠을 설쳤기 때문인 듯 했다. 세 번째 평양 방문이지만 갈 때마다 설레는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조카들이 살아 있을까? 누가 평양으로 와서 나를 볼까? 평양은 얼마나 변했을까? 평양에 가서 무엇을 하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좋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설치다 보니 몸과 마음이 가볍지 않을 수밖에 없다.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간단히 하고 일행이 될‘이선생’이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평양에 누님과 누이동생들이 있다면서 이번 여행이 1992년 이후 네 번째라고 했다. 컴퓨터 제조업체를 갖고 있다는 그는 지금은 플로리다에서 은퇴생활을 하고 있으나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으며 북한에도 재정적인 도움을 주는 눈치였다.
차여사가 차를 가지고 와서 이선생과 나는 북경공항으로 나가 출국수속을 하고는 고려항공 J5152에 탑승했다. Ilyashin 96형인 이 비행기는 소련에서 만든 것으로 가습기가 수증기를 내듯이 안개 같은 김을 기내에 내뿜고 있었다. 왜 그런지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비행기는 비상시 화물기로 사용하게 만들었는지 의자의 등 받침이 밑으로 접혀져서 납작했다. 등받이에 기대어 쉬거나 잠자기 곤란한 좌석이었다. 11:30분에 정시 이륙했는데 비행기 안에서 한 시간 손해본 기분이었다. 북경시간이 평양보다 한시간 늦어 평양에 2시20분께 도착했기 때문이다. 기내에서 스튜어디스가 간단한 도시락을 제공했다. 비행요금 250달러에 비하면 매우 초라한 식사였다.
평양이 가까워지면서 머리 속에 잡념이 뒤엉켰다. 먼저 웰스(H.G.Wells)의 “시간 기계(Time Machine)”라는 공상 과학소설이 생각났다. 이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가면서 40~50년의 과거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분은 평양 근교에 있는 순안공항에 내려서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 닿았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찾는데 탑승자 수에 비해 시간이 많이 걸렸다. 아마도 북한정부가 이 비행기로 필요한 물품을 운반해 오지 않았나 싶었다. 짐은 초라한 콘베어 벨트로 된 원형의 자동 운반기에 실려 나왔다. 한쪽 길이가 15m 정도인 이 자동 운반기는 미국에서는 50년 전에도 사용하지 않았을 성 싶었다. 내가 시애틀에 1962년 도착했을 때도 벌써 현대식 회전 운반기가 장치돼있었던 것이 생각난다.
순안 비행장은 지난 번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시 TV에 많이 비쳐졌지만 크기로 본다면 60년대 초 서울의 김포공항만 했다. 시설면으로 볼 때 한나라의 수도를 찾는 손님들에게는 너무도 빈약한 시설로 보였다. 순안 비행장 자체는 1980년과 크게 차이가 없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1980년 당시는 선물센터가 없었으나 지금은 공예품과 예술품 등을 파는 상점이 들어서 있다는 점이다.
짐을 찾고 세관을 통과하는 절차가 전보다 까다로웠다. 옷가지 중 청바지(Blue Jean)를 못 가지고 들어가게 했고 출판물도 꼼꼼하게 조사했다. 세관원은 내가 서울에서 가져온 6월 14·15·16일자 한국일보를 보더니 버리지 말고 출국할 때 꼭 가지고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통관서류에 신문휴대 내용을 기재하지 않았는데 출국 시 나를 알아보고 신문을 가지고 나가느냐고 확인하는 것이었다. 다행히 버리지 않아 가방에서 꺼내 보여준 기억이 난다.
나중에 알았지만 같은 고려호텔에 투숙한 방북자 김선생과 그의 부인은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주려고 블루진을 많이 사 가지고 왔으나 통관이 안 되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공항에 맡겨뒀다가 출국할 때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공항에는 북한의 해외동포 후원회에서 미니버스를 가지고 나와서 이선생, 김선생부부, 그리고 나와 짐을 싣고 평양을 향해 출발했다. 평양과 순안 사이의 거리가 약 45분 정도였는데 도중 산에 전보다는 나무가 많아 보였으며 밭에서 풀을 뽑거나 논에서 김을 매는 사람들을 간혹 목격했다.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줄을 지어서 행진하는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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