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양희은씨가 몇달전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노래의 생명력에 관한 말을 했다. “노래에도 팔자가 있고 생명이 있지요. 두세달 만에 잊혀지는 곡이 있는 가하면 10년, 20년, 30년이 지나도 살아 움직이는 노래가 있어요”
올해로 30년을 맞은 그의 가수연륜과 나이가 같은 노래 ‘아침 이슬’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유신이후 10여년을 금지곡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기어이 살아서 저항의 카타르시스가 되어주었던 노래. 475세대에게 ‘아침 이슬’은 노래 이상의 끈끈함을 갖는다.
노래에 생명이 있다면, 노래하고 싶은 열정에도 생명이 있지 않을까. 누르고 눌러도 없어지지 않고, 눌려있던 세월만큼 오히려 더 강인해지는 열정이 있는데,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은 노래에 대한 열정이다. 최근 나는 그런 열정이 마침내 현실과 접목되어 통쾌하게 분출되는 현장에 가볼 기회가 있었다.
지난 주말 LA 다운타운의 리걸 빌트모어 호텔에서는 특이한 리사이틀이 열렸다. 주부 김선규씨(58)의 발표회였다. 거의 300명의 친지들을 모아놓고 한국가곡에서 부터 가요, 팝송, 뮤지컬, 찬송가까지를 두루 섭렵하며 정열적으로 무대를 이끌어 간 그는 ‘아마추어’이다. 젊은 시절 음악도도, 반짝 빛보다 물러난 가수도 아니다.
단 하나,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그를 무대로 끌어낸 것은 유치원때부터 가슴에 씨앗처럼 박혀있던 노래에 대한 열정이었다. 가족중 한사람이 스폰서로 나섬으로써 1년전부터 계획하고, 세명의 선생으로부터 레슨을 받으며 준비해 만들어낸 결과가 그날의 리사이틀이었다.
1943년생인 그의 여고동창들은 “저 에너지는 누구도 못당한다”고 감탄도 하고, “우리 나이에 이런 걸 할 용기를 갖다니 참 자랑스럽다”고 칭찬도 하고, “저 끼와 재능을 진작에 누가 이끌어 주었더라면…”하고 아쉬워도 했는데, 그리고 나서 결론처럼 하는 말은 “나이 들어서라도 하고 싶은 것 했으니 얼마나 좋은가”였다.
냉정하게 말해서 이제까지 그는 동창들이 칭찬하고 부러워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던 것같다. 너무 강한 개성 때문에 여성, 주부, 나이…어떤 틀을 갖다 대도 잘 맞지가 않아서 ‘다름’이 그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남들 하는 식이 아니라 나대로 살려다 보니 실수도 많았다”고 그 자신도 말했다.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노래가 발성연습만으로 되는건 아니더군요. 연습하다 제대로 안돼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어요. 그런데 한참 고민을 하다 보면 노래가 달라져요. 이번 리사이틀은 이제까지 살아온 내 인생과 노래가 함께 녹아져서 만들어진 결실입니다”
그를 오래 알아온 친구들, 가족들이 한데 모인 그날의 공연은 그래서, 가수와 관객의 자리라기 보다는 농부가 땀흘려 수확한 과실들을 자랑스럽게 이웃과 나누는 축제의 자리에 더 가까웠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되면 해마다 면목이 없다. 나무들이 헐벗은 가지에 연둣빛 잎새를 하나둘 돋아내는 것으로 시작해 열매를 주렁주렁 만들어 내는 사이, 그 긴 시간동안 “나는 뭘했나”생각하면 부끄러울 뿐이다.
자녀들 진학·취직·결혼시킨 것, 배우자와 별 말썽없이 잘 지내는 것, 직장일 충실히 하며 살아온 것 모두가 다 결실이라면 결실이겠지만, 나이 들수록 이 세상에서 내가 정말로 얻고 싶은 결실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같다.
의식의 심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뭔가 보이는게 있지 않을까.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현실과의 부대낌으로 내면의 모든 것이 둥글둥글하게 순화되었지만, 그 사이에서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고 날카롭게 모난 돌멩이처럼 살아있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있다. 돌파구를 찾지 못해 억눌려 있던 열정, 대개 이루지 못한 젊은 날의 꿈이다.
감나무에 감이 많이 열리게 하는 비결은 나무를 계속 잘라주는 것이라고 한다. 너무 쉽게 자라지 않도록 억눌러 주면 나무의 노화가 방지되어서 50년간이나 열매를 딸수가 있다는 것이다. 오래 억눌려 있던 꿈은 눌려있던 만큼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조건이 될수도 있다. 단 그 씨앗을 이제라도 싹틔우려는 용기가 있을 때 결실의 축복은 허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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