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나야. 여기? 삼성 역이야. 응, 금세 갈게. 끊어.’ 이런 식의 간단한 대 화들이 서울에서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에 손에 쥐어진, 혹은 목에 목걸이처럼 걸린, 핸드폰로. 서류가방을 들고 전철역 계단을 오르는 중년의 신사, 힙합바지를 입고 전철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 칼국수 집에 점심을 함께 하려고 나온 동료들로 보이는 여직원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사거리를 건너는 외판원으로 보이는 아줌마, 서울역으로 통하는 지하도에서 김밥, 떡, 덩킨 도너츠 등을 벌여놓고 파는 행상인… 그들의 손에는 모두 핸드폰이 쥐어져 있었다.
가방이나 주머니에 넣어 소지품으로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니라 손에 쥐거나 혹은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걸 쥐고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바삐 다니는 모습은 마치 구조현장에서 무전기로 긴급한 상황을 긴밀하게 소통해야 하는 구조대원들을 연상시켰다. ‘여기는 독수리, 비둘기 나와라, 오버’ 라고 할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손에 꼭 쥐고 종종걸음들을 하는 모습은 또, 휴지를 들고 급한 볼일을 보러 가는 듯한 장면도 연상되었다. 이렇게 아무튼, 서울의 핸드폰 문화는 내게 진풍경으로 다가왔다.
하루는 전철을 타고 여러 정거장을 가며, 그 칸에 탄 승객들이 핸드폰 쓰
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볼 수 있었다. 탈 때부터 내릴 때까지 줄곧 핸드폰
에 매달려 있는 청년, 올라타자마자 핸드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하는 여
대생, 자리에 앉아 두 손에 꼭 쥐어진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아가씨, 정거장에서 내리려다 자리를 둘러보곤, 자리에 떨어뜨린 핸드폰을
급히 집는 아줌마… 그러다가 출구 쪽에서 여고생으로 보이는 학생 둘이
팔짱을 끼고 소곤소곤 얘기하다, 웃다가,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공연히 반갑고 정겨워 한동안 그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어느 정거장에서 그 중의 한 학생이 내렸다. 내리면서 엄지와 약지로 전화 거는 시늉을 했다. 차가 떠나면서 그들의 대화는 이제 핸드폰을 통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할 말이 많을까, 원. 그러면서 괜히 내 속이 헛헛해 왔다. 한시도 침묵을 지키지 못하는 성급함이 걸렸다.
안 그래도, 우리 한국사람 모두가 가지고 있는 큰 결점 중의 하나가 급한
성미이다. 사탕을 입안에서 녹이지 못하고 빠삭 깨물어 먹고, 여러 종류의
술을 한꺼번에 마시기 위해 폭탄주를 만들어 원 샷으로 들이키고, 국에 밥
을 말아서 훌훌 넘기고, 고치고 길들여 쓰기보다는 신제품으로 갈아치우기
를 좋아하고… 이런, 결코 좋다고 볼 수 없는, 그러나 타고나는 급한 성미
를 잡기 위해서인가? 우리 조상은 여백의 멋과 지혜를 생활 곳곳에 깊이
박아놓으셨다.
기다림을 가르치는 시간의 여백과, 눈에 안 보이는 것도 볼
줄 알게 해주는 공간의 여백을. 우리가 안 먹고는 못 사는 김치, 된장, 간장, 고추장. 이것들은 모두 발효, 즉 삭힘을 요한다. 시간이 가야 삭으면서 익어 제 맛이 난다. 그걸 알기에 담가놓고 기다려야 한다. 싫어도 할 수 없다. 우리 고유의 소리는 또 어떤가. 국악의 창에 반주를 해주는 북은 심심하면 가끔, 한번씩 쿵, 떡, 하고 반주를 넣어줄 뿐이다.
그리하여 북은 사이(여백)잡는 악기라고까지 불린다. 그러나 그 절제된 소리는 얼마나 멋들어지게 창과 어울리는가. 우리 고유의 종각 밑에는 독을 묻어 종소리가 되돌아 나오게 한다. 소리에 여백을 두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서양 종소리에 비해 그 소리가 은은하고 깊고 오래간다. 우리의 그림 또한 거의 절반이 여백으로 남겨진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여백의 의미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다. 그것은 충만을 향한 기다림이요, 희망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 인격을 은은하고 깊게 해준다. 그렇게 소중한 여백을, 아무 것으로나 메우려고 허둥대지 말아야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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