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들려온 소식은 차마 지금이 추수감사절이 아니었으면 싶었다. 괜스레 전화해서 우울한 소릴 들었구나 싶었다. 11월 넷째주 목요일은 추수감사절이다. 추수감사절 바로 전 일요일에 대개들 감사절 예배를 드린다. 한 해의 소출과 그동안 인도해 주셨음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직장인들은 추수감사절이 휴일이므로 전날 수요일부터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피자도 그 많은 직장인들 중 예외는 아니다. 주중인 목요일 하루 쉰다는 여유 때문에 다 온통 사방이 명절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이 곳의 추수감사절 분위기가 9.11 테러사건 때문에 예년과 다르다는 친구와의 전화통화에서 나는 괜히 전화했구나 하고 후회했다.
한 해의 추수를 도시 사람들보다 더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할 농촌의 분위기를 내가 이해하는 데는 한국과 미국이라는 먼 거리가 관계가 없었다. 자신들이 한해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수확한 벼를 쌓아놓고 불질러버려야 하는 한국 농민들의 농심. "넓은 들에 익은 곡식 황금물결 뒤치며…""황금 빛 논과 밭에 풍년이 왔다. 드맑은 하늘가에 노래 퍼진다" 우리가 추수감사절에 흔히 부르던 찬송가가 지금 한국의 농촌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깨달았기에 감사절 얘기는 하지 않는 게 나을 뻔했다.
이 추수감사절에 한국에서는 쌀 과잉생산에 따른 쌀값 폭락으로 정부 종합청사 앞에서 농민들이 "쌀값 보장"을 요구하며 집단 시위를 벌이고 있다. 여기에다 양곡유통위원회가 내년에는 추곡 수매가 인하를 건의해 불난 집에 기름 붙는 꼴이 된 셈이다. 각 지방에서 수십 대의 버스를 대절해 서울까지 올라온 농민 2만여명은 폭락한 쌀값 보장과 양곡유통위원회의 추곡 수매가 인하 건의에 항의하며 고속도로 진입로까지 가로막는 사태로까지 번지고 있다고 한다. 땀흘려 수확한 곡식들이 풍년이 됐는데도 이 감사절에 그 곡식 때문에 시위를 하고 볏단에 불질러야 하는 이들의 심정은 어떠할까?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우리는 그래도 한해동안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이러저러한 축복을 생각하면서 다소 들뜬 기분으로 추수감사절을 맞고 있음이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 농촌에선 "추수" 말만 나오면 속이 시커멓게 타 들어갈 정도로 침통한 분위기란다. 어디 농민들뿐이겠는가. 차마 감사할 수 없는 감사절을 맞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얘기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젊은이들, 경제구조의 한파 속에서 아직도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실업자들, 지난 9.11 테러사건으로 가족이나 친지들을 잃은 희생자 유가족들, 전쟁으로 생죽음을 당한 아프가니스탄 사람들, 그야말로 감사절에 고난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무엇보다도 추수감사절에 자신들이 추수한 곡식을 놓고 항의 시위하는 농민들은 이들 가운데 가장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도하 라운드’ 출범으로 농업개방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관세화를 전제로 한 완전개방 압력이 거세지고 있는 것도 현재 국제적인 추세다. 한국 농업이 위기에 놓여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농업시장 대폭 개방이라는 대외 요인을 맞아 농민에게 손해가 안가는 정부의 획기적인 농업정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나는 전화통화를 하면서도 한편 머리 속으로는 발뺌할 수 있는 말을 찾아내기에 바빴다. 그곳이나 이곳이나 우리 주위엔 항상 어려운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니 모두가 진정 함께 기뻐하는 감사절이 될 수 있도록 기도 열심히 하자는 목사님다운(?) 얘기로 장거리 통화를 황망히 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런저런 음울한 얘기들이 귓전에 맴돌며 마음을 짓눌렀다.
추수감사절은 우리 가정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축복과 돌봐주심에 감사해야 함은 물론이겠지만, 이웃의 아픔을 생각하고 함께 하면서 그 짐을 같이 나누어 질 수 있는 나눔의 정신도 꼭 필요한 때라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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