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학기 성적표를 받아본지 얼마 되지 않은 각 가정에서는 아마도 이런저런 드라마가 펼쳐졌으리라. 올 A를 받던 아이가 B를 하나 받은 집은 그 B 하나 때문에 아이가 문초를 당했을 것이고, B, C 밭이던 성적표에 A가 하나쯤 낀 집에서는 경사라도 난 듯이 기뻐했을 것이고,
F학점이 들어 있었다면 온 집안에 비상이 걸렸으리라. A, B, C, D, F- 이 다섯 알파벳이 학부모를, 특히 우리 한인 학부모들을 웃기고 울리고 울화병까지 준다.
11학년의 딸을 둔 한 지인이 전화를 했다. 딸아이가 기말시험 공부를 유난히 열심히 하는 것 같아 이번 학기에는 성적표가 은근히 기다려지더라고 했다. 그 아이는 평소에 내가 퍽 호감을 갖고 있는 아이이다. 맑고 착하고 발랄하고 귀엽게 생기고 무엇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예쁜, 참 보기 드문 아이이다.
학교 성적은 주로 B를 받아온다. 능력이 안 돼서가 아니고 너무 욕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 엄마는 그 점을 조금 안타까워한다. "웬만한 대학에는 가주었으면 좋겠는데…”하고. 평소에 A를 고집하지 않는 그 아이 엄마가 이번에는 설레는 마음으로 딸아이의 성적표를 열었다고 한다. A가 하나쯤은 끼어있을 것 같은 예감으로. 그러면 딸아이가 얼마나 좋아할까 하고. 그런데 턱, 하니 ‘F’가 끼어있더라고. 기가 탁, 막히더라고. 눈앞이 캄캄하더라고 했다.
아이의 F학점을 대하는 보통엄마들의 첫 반응은 누구나 다 비슷할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순간적인 절망. 아이가 그 당시에 집에 있었다면 우선 있는 대로 목청을 돋워 아이의 이름을 불러댈 것이다. 아이가 들었거나 말거나 서너번쯤 불러 제칠 것이다.
“너, 이리 좀 와봐!!” 그리고는 실망과 분노를 퍼붓고 종 주먹을 대며 따질 것이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컴퓨터 앞에서 게임이나 해대고. 도대체 뭐가 되려고 이래.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거야. 엄마 아빠 뼈빠지게 고생하는 거 보이지도 않아. 너도 사람이냐… 숨도 안 쉬고 목소리가 나올 때까지 퍼부을 것이다, 아마.
내게 전화를 한 그 엄마는 말을 이었다. 아이가 그 때 집에 없어서 다행이었다고. 자신의 감정을 추스를 수 있는 시간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고. 아마 그 때 아이가 곁에 있었다면 F학점보다도 엄마의 실망하는 모습이 아이에게 더 큰 상처가 되었을 거라고 했다.
아이와 선생님과 의논한 끝에 결국은 낮은 반으로 옮기기로 했는데 아이의 자존심을 다칠까봐 걱정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도 아이가 오히려 홀가분해 하는 것 같아 자신도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야기였다.
‘아이들 교육’은 우리 모두가 우선 순위 1, 2 위에 놓고 있는 중요한 과제이다. 그것 때문에 이민 온 가족들도 많고, 그것 때문에 이산가족이 되어 사는 경우도 종종 있고, 조기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실상 미국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는 일은 한국에서보다 훨씬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간단한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변수가 여럿 들어있는 삼차, 사차방정식 아니 그보다 더 난해한 고등수학처럼 보일 때가 많이 있다. O, X로 명확한 답을 고를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고등학교에서의 학과목 선택부터 얼마나 골치 아픈가. 선택의 여지가 너무 많기 때
문에 머리가 아프다.
그래도 다행히 성적표는 우리가 익숙한 A, B, C로 나온다. 물론 A가 B보다, B가 C보다 낫다. 그러나 과연 성적표 읽기를 일차방정식으로 쉽게 푸는 것이 옳은지? 그 이면에 숨어있을 아이의 노고와 힘겨움을 읽어내고 사랑과 지혜를 보태서 성적표 방정식을 제대로 풀어낸 그 엄마가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그 아이의 예쁜 마음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F학점으로 인해 더욱 돈독해졌을 그 엄마와 아이간의 신뢰와 사랑. 그걸 가능하게 한 그 엄마에게 ‘A+’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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