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프리카의 킬링필드, 르완다를 가다’
▶ CLWMF 김평육 목사
투치족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자 목사인 남편과 함께 기타라마(Gitarama)의 천주교회로 피난했던 가파링가 사모가 인테라하무이의 칼날에 남편을 잃고 키갈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교회에 돌아와서도 기가막힌 모습에 한동안 넋을 잃어야 했다. 교회 마당은 시체로 덮여 있었고, 엄마의 싸늘한 시신 옆에서 울고 있는 고아 6명을 발견했다. 교회 마당의 시체더미는 유엔이 치워 주었지만 여섯 명의 고아들을 양육할 길이 막연했다.
가파링가 사모가 얼마나 처절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을까?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내 마음이 그렇게 요동했던 것은 가파링가 사모가 부르짖는 기도의 힘이었다고 생각해 본다. 부르짖는 기도는 지구의 반대편에 살아가는 사람도 부르는 힘이 있는가 보다.
가파링가 사모는 6명의 전쟁고아들과 또 다른 미망인이 양육하는 4명의 고아를 위해 임시 숙소를 마련해 주었고 몇 달 동안 생활할 수 있는 생활비도 지원해 주었다. 또 이들을 위해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결심으로 이듬해 2월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우간다로 떠났다.
한편 필자는 산간지역에 위치한 탄자니아의 난민촌을 찾아가기로 했다. 자이르의 고아 난민촌은 공항근처에 위치해 기자들과 구호단체가 많았고 이 때문에 이곳 소식은 주위에 잘 알려진 데다 다른 곳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형편도 괜찮았다.
우간다에서 무투쿨라(Mutukula) 국경을 넘어 탄자니아에 도착하니 우선 의사소통이 문제였다. 르완다에서는 아와가 통역을 맡았는데 스와힐리어가 공용어인 탄자니아에서는 영어도 르완다어도 전혀 사용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았다. 더구나 국경지역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낮아 간단한 의사소통조차 힘들었다.
교통사정도 매우 열악했다. 포장도로는 찾아볼 수 없었고 한번이라도 고장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는 차량조차 없었다. 국경을 넘은 후 탄자니아의 부코바(Bukoba)까지 덜덜거리는 픽업을 타고 가야 했는데 사람과 짐짝이 뒤섞여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5시간을 달려야 했다.
어렵게 부코바에 도착해보니 이미 주위를 식별하기 어려운 캄캄한 밤이 됐다. 르완다에 도착하던 날 느꼈던 그 공포감이 다시 밀려왔다.
우간다에 있는 유엔난민고등판무관사무소(UNHCR)를 방문했을 때 직원들이 응가라(Ngara)의 캠프는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말렸다. 대신 비교적 안전하다고 가르쳐 준 카라위(Karagwe) 난민촌을 찾을 생각이었는데 탄자니아에 도착하던 날 50여명의 난민이 살해됐다는 보도를 접했다.
더구나 아와는 투치족으로 후투족 난민촌에 함께 갈 수는 없었다. 카라위 난민촌은 부코바에서 하루 정도 거리다.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라위에서는 숙박료가 3달러인 냄새나는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묵고 다음날 아침 UNHCR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타운에 사무실이 있는 UNHCR은 매일 아침 난민촌으로 차량을 보내는데 이를 얻어 타고 마침내 난민촌에 들어 갈 수 있었다.
살인과 약탈 사건이 빈번하다는 난민촌…. 사람들은 나무와 풀을 베어다 한 평 정도의 초막을 짓고 여기에 유엔이 지급한 파란색 비닐 커버를 씌웠다.
식량을 배급받기 위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 먼 산에서 장만해온 땔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사람들, 병든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해 초막 뜰에 힘없이 누워있는 사람들, 적십자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등등. 모두가 걸레조각 같은 누더기에다 맨발 차림이었다. 비 내린 풀밭에서 담요도 없이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도 많았다.
르완다와 탄자니아의 국경인 카게라 강은 연꽃과 같은 파란 식물의 뿌리가 서로 뒤엉켜 강물을 덮고 있었다. 그 위를 걸어보니 울렁거리기는 했지만 빠지지는 않았다. 카라위 캠프에 모여든 5만 명의 난민들은 이 식물 덕택에 강을 걸어 넘어와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카라위 캠프의 취재에 성공한 필자는 부코바로 돌아온 뒤 밤배를 타고 빅토리아 호수를 건너 이튿날 아침 무완자(Mwanza)에 도착했다. 케냐를 경유해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다.
그런데 갑자기 내 자신이 응가라 지역의 난민촌을 취재하지 않고 공포에 질려 도망하는 것 같아 부끄럽게 여겨졌다. 응가라까지는 무완자에서 버스를 타고 하루면 도착하는 길이지만 버스가 일주일에 한번 있는 데다 이미 차가 떠난 후였다.
유엔기구와 국제기구의 직원들은 전용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데 기독교 신문 발행인은 버스를 이용해야 하다니. 영세한 선교사가 되는 것보다는 유엔이나 국제 NGO를 통해 세계를 위해 일하라고 한인 젊은이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막막해하고 있는데 다행히 유럽인 의사를 만나게 됐다. 응가라 난민촌이 가까운 비하라무로(Biharamuro)라는 타운의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며 비하라무로까지 차를 태워 주겠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응가라로 가는 차를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설명과 함께.
의사의 도움으로 비하라무로에 도착해 정류장에서 응가로행 차를 기다렸는데 버스는 오지 않고 날만 저물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아프리카의 오지마을에서 또 하룻밤을 지내야 했다.
한패거리의 남녀가 여인숙에 함께 투숙했다. 탄자니아의 수도 다르 에살렘(Dar Essalem)에서 온 사람들로 영어가 통했는데 응가라 난민촌으로 전도활동을 가던 중이었다. 이들과 함께 난민촌에 가기로 약속하고 편안하게 밤을 지낸 뒤 다음날 아침 이들의 픽업 트럭을 타고 난민촌으로 향했다.
차는 산간지역을 서너 시간 달렸는데 길가에는 원숭이 떼가 몰려다니는 등 자연이 무척 아름다웠다. 응가라에 가까워지면서 서서히 난민들의 행렬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땔감을 구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모두가 머리에 땔감을 이고 길게 줄지어 난민촌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난민들은 우리의 차를 세우려고 했지만 운전사는 더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아 이들을 떼 놓곤 했다. 약탈이 두려워서다.
마침내 거대한 난민촌이 시야에 들어왔다. 응가라 지역의 난민캠프 중 가장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베나코(Benaco) 캠프다. 픽업트럭이 베나코 캠프 한가운데 있는 시장어귀로 들어섰다.
수많은 난민들의 무리를 보니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난민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픽업 뒤에 앉아 있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청년 하나가 큰칼을 들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며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큰칼로 나를 내려치기 위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조마조마한 가운데 이 청년은 얼굴을 가린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탄자니아에서 온 전도단원들도 몹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텐트를 설치할 곳을 찾아 이리저리 다니다 한 교회 근처 야산에 장소를 정하고 텐트를 설치하는 동안 필자는 전도단 대표와 함께 난민촌으로 향했다. 오후 늦은 시간이었다.
난민촌의 UNHCR 사무소를 찾아가 보니 유럽인 직원 몇 명이 타운으로 돌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들의 사무실은 30리 밖 응가라 타운에 있는데 이곳에 여인숙이 있기는 하지만 방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라며 걱정해줬다. 이들의 차를 타고 응가라로 가려면 빨리 판단을 내려야 했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타운에 갔다가 숙소를 찾지 못하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생각에 전도단과 함께 텐트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이 소리를 들은 유럽인 유엔 직원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난민촌은 유엔 파견 직원들조차 공포를 느낄 정도로 위험한 곳이었던 것이다. 텐트로 돌아오니 사방이 캄캄해졌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