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타임스 사진기자 이장욱(33)씨가 언론계의 가장 영예로운 상인 퓰리처상을 30일 수상했다.
콜럼비아 대학 로우 도서관에서 거행된 이날 시상식에서 이씨는 동료 사진기자들과 함께 긴급 뉴스 사진(9.11 테러 사건) 부문과 특집 사진(아프가니스탄 전쟁) 부문 등 2개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았다.
이씨는 "이번 상은 뉴욕 타임스 사진부의 팀웍으로 일궈낸 결실"이라며 퓰리처 수상 소감을 밝혔다.
■NYT 이장욱기자 인터뷰
영화인들에게 오스카상이 있다면 언론인들에게는 퓰리처상이 있다. 퓰리처상은 언론의 정도를 강조해온 조셉 퓰리처(1847-1911)의 유언에 따라 지난 1917년부터 매년 시상돼 오고 있다.
퓰리처상은 크게 저널리즘(보도, 사설, 특집, 사진 등등)과 드라마, 음악 부문 등으로 나눠지며 이 분야에서 총 21개의 상이 시상된다. 퓰리처상은 상금(7,500달러) 보다는 명예에 훨씬 더 큰 무게를 두고 있다.
한인 수상자로는 AP 통신의 강형원 기자와 덴 노 기자(1999년·특집 사진), 최상훈 기자(2000년·심층보도), 그리고 뉴욕 타임스지의 이장욱(2002년·긴급 뉴스 사진, 특집 사진)씨 등이 수상한 바 있다.
올해 퓰리처 수상자 명단이 발표됐을 당시 이장욱씨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로 파견돼 있었다.
만약 뉴욕에 있었어도 스포츠, 사회, 문화, 심지어는 기상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사진을 찍는 그로부터 시간을 할애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들다. 2002년 퓰리처상이 시상되기 바로 전날인 5월 29일 이장욱씨를 드디어 만날 수 있었다. <편집자 주>
포토 저널리스트 이장욱씨를 만난 곳은 그의 선배가 운영하는 플러싱 소재 모 카페였다.
’시간’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답게 그는 약속시간에 정확하게 카페를 들어섰다. 키가 180센치가 넘는 그의 뒤에 가냘픈 여성이 함께 서 있었다. 그의 아내 박설빈(그래픽 디자이너)씨였다.
먼저 축하의 뜻을 전한 뒤 소감을 물으며 기자가 펜을 들고 취재할 준비를 하자 부부가 약간 놀랜 표정을 짖는다. "아니, 오늘 인터뷰하실 거예요? 저 말 잘 못하는데 어떡하죠"라며 이장욱씨가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뉴욕 타임스의 기자이자 명예로운 퓰리처상의 수상자였지만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권위나 거만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는 없었다.
아프가니스탄은 어땠냐고 물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기 전날 현지에서 총격전으로 4명이 죽었다는 소식이 뉴스에 나오더군요. 제발 가지 말라며 펑펑 우는 와이프를 두고 떠나야했을 때 가슴이 찢어졌습니다."
박설빈씨가 옆에서 거든다. "전쟁터로 남편을 보내는 아내의 심정이 어땠겠어요? 하지만 자신의 직업을 천직이라고 생각하는 남편을 붙잡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씨가 아프가니스탄 취재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것은 구두닦이 소년과의 만남이었단다.
"소년을 보는 순간 저의 옛 생각이 나더군요. 소년에게 ‘앞으로 네가 무엇을 하고 싶은 지를 찾고 그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네가 그 목표를 이루고 성공해서 뉴욕에 올 기회가 되면 와서 나에게 연락해라’고 말했습니다.
이장욱씨는 한국에서 대학 한 학기(중앙대 건축공학과)를 마치고 부모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2년제 커뮤니티 대학에서 밤에는 영어를 배우며 낮에는 창고 노동일, 피자 배달, UPS 배달부로 일하며 학비를 마련했다. 학교까지 가는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고속도로 옆길로 걸어가면서 겨울에는 미끄러지기가 일쑤였단다.
"너무 피곤해서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입에 문 채로 잠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때가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생활이 어렵고 힘들었지만 그때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무궁무진한 꿈이 있었죠. 마치 세상이 다 내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도미노스 피자 배달원으로 일할 때 자주 피자를 배달한 고객이 있었어요. 뉴욕 타임스에 입사하고 얼마 안됐을 때 누가 너무나 반가워하며 ‘당신 나 기억 못해요’라고 물어보더군요. 그 고객이 뉴욕 타임스의 프리랜서 기자였더군요."
이장욱씨는 커뮤니티 대학을 졸업한 뒤 1990년 뉴욕 대학(N.Y.U.) 대학에 사진 전공으로 입학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 일을 하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복권에 두 번 당첨됐어요. 첫 번째 복권 당첨은 와이프를 만난 것이고 두 번째 당첨은 사진 기자가 된 것이죠."
아내 박설빈씨가 남편의 ‘사진사랑’에 대해 한 마디 한다.
"남편은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지만 일하지 않을 때는 사진을 많이 찍지는 않아요. 워낙 성격이 꼼꼼하고 사진에 있어서는 완벽을 추구하기 때문에 한번 카메라를 들면 자신이 만족하는 장면을 찍을 때까지 카메라를 놓지 못하기 때문이죠. 그래서인지 남편이 사진을 찍을 때만은 절대 제가 간섭하지 않아요."
올해 퓰리처상을 위해 뉴욕 타임스지가 퓰리처 재단에 출품한 이씨의 사진 중에는 9.11 월드 트레이드 테러 사건 당시 북쪽 타워가 붕괴되는 장면이 담긴 사진이 포함돼 있다.
"그 사진은 건물이 무너지는 사진이 결코 아니라 수천여명이 목숨을 잃는 모습이 담긴 사진입니다. 사진을 보면 아직까지 마음이 아파요."
이번 퓰리처상 수상으로 ‘스타’가 된 느낌이 좋으냐고 물었다.
"많은 사람들이 축하를 하며 ‘엄청난 상금을 받게돼 좋겠다’고 얘기하더군요. 퓰리처상은 상금은 많지 않아요.(퓰리처상의 상금은 부문당 7,500달러이다) 하지만 제가 한 일에 대해 인정을 받게돼 자긍심은 느낍니다.
기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취재원을 만날 때 기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만날 수 있는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스스로가 진실해질 때 내가 하는 일을 가장 열심히 할 수 있고 대통령을 만나든 거지를 만나든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가 퓰리처상을 받음으로써 결코 스타가 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장욱씨가 지금까지 찍은 사진 중에 가장 맘에 드는 작품은 대학 시절 한 홈레스를 3년동안 거의 매일 만나서 취재하며 찍은 사진과 대학 졸업 후 있었던 사진 워크샵 프로젝트에서 99세 노파와 하루를 보내며 찍은 사진들이란다.
이씨는 "기회가 된다면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에서 일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앞으로 아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될 것 같습니다. 특히 중국의 경우, 거대한 잠재력이 있잖아요. 흙에서 보석을 캐는 마음으로 아시아를 돌아다니며 취재해보고 싶습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장욱씨 부부와 약 3시간동안 얘기를 나누며 그들의 마음도 이씨의 사진처럼 거짓이 없음을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었다.
"훌륭하고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포토저널리스트로 일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기 좋은 사진을 찍는 것 보다 사람들의 삶의 일부가 되고 그들 역시 저의 인생의 일부가 돼서 진실한 기록을 필름에 담는 것이 포토저널리스트의 역할이 아닐까요?"
<정지원 기자> jwj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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