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물 산책
▶ 롱아일랜드 음악대회 김민선 학장
음악가로 대성을 꿈꾸던 한 젊은 음악도가 후진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교육자의 길을 들어선 지 10년만에 재미 한인 최초로 음악대학을 설립한 화제의 주인공이 있다.
롱아일랜드 음악대학(Long Island Conservatory)의 김민선 학장(여.42)이 바로 그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의 길을 걸어온 그는 결혼과 도미, 한국과 미국을 오가는 생활 속에서 음악 공부의 기회를 잃게 되면서 음악 교육에 매달리기 시작했는데 이제 음대 설립으로 결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음악교육가로서 본격적인 출발은 지난 1992년 리즈마(Long Island School of Music and Arts) 학원을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학원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문사를 찾은 그는 꼭 음대를 만들고 말겠다고 포부가 대단했었다.
이 말대로 지난해 가을 2년제 음대의 설립 허가를 받아냈고 금년 봄 학생을 모집했다. 그리고 2년제 대학을 허가받은 그 날부터 그는 4년제 음대 설립을 위한 준비를 서두르고 있다.
김 학장이 음대를 만들어 학장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교육의 도시 청주에서도 최고의 교육자 집안 출신이다. 할아버지가 청주대학을 설립한 김원근 옹이고 아버지는 이대 재단이사장과 총장을 역임한 김준철 박사이다. 그리고 현 청주대학교 김윤배 총장이 친 오빠이다.
집안에서는 그에게 경영학을 공부하여 교육사업을 하라고 요구했으나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겠다고 고집하여 음대로 진학했다. 그런데 그는 결국 다시 U턴을 하여 학교 경영자가 된 것이다.
그는 세살 때 언니를 따라 유치원에 다니면서 피아노를 배웠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청각이 예민하고 음악적 소질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소학교 때는 바이얼린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청주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서울에 가서 음악 레슨을 받을 정도로 열심이었다. 그리하여 이대 음대에 진학하여 바이얼린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남편과 함께 유학생 부부로 도미한 후 남편이 MBA 공부를 한 보스턴의 클라크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했고, 뉴욕에 이주한 후에는 무대장식과 패션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88서울올림픽 때 NBC방송에 근무하던 남편이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자 생활터전이 다시 서울로 옮겨졌다. 올림픽 후 뉴욕에 돌아온 그는 음악을 다시 공부하려고 줄리아드 음대의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나 그 사이에 아기도 생겨 더 이상 자신의 캐리어를 키워 나가기에는 공백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길이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열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살다가 다시 미국에 온 후 시간적 여유를 틈타 교회 성가대를 지휘하면서 교회의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는데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나면서 학생이 40여명으로 늘어났다.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다 보니 재미도 있었고 적성에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음악교육을 해보자고 시작한 것이 리즈마 음악학원이었단다.
이 학원은 92년 롱아일랜드의 윌리스톤 팍의 3,000 스퀘어피트의 건물에서 8학급 규모로 시작했으나 곧 알버슨에 있는 1만2,000 스퀘어피트의 현 건물에 30개 강의실과 도서실, 2개의 컨서트 홀, 오디오 스튜디오, 파킹장을 갖추었다. 이 학원을 거쳐 나간 학생은 지금까지 5,000여명에 이르는데 줄리아드나 마네스 등 유명 음악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김 학장이 학원을 운영하면서 가장 신경을 써서 심혈을 기울인 것은 좋은 교수진을 갖추는 일이었다. 학원을 시작할 무렵은 러시아와 동구권의 개방 초기였고 이 지역의 음악수준이 세계적이라는 점에 착안, 그는 러시아와 동구권을 돌면서 유명교수들을 찾았다.
당시 경제사정이 좋지 않았던 때라 초빙 교섭은 쉽게 이루어졌다. 이들에게 H-1 비자와 영주권을 스폰서 해주면서 우수한 교수진을 확보한 것이 이 학원의 성장 비결이었던 것이다.
그는 러시아 및 동구권과의 인연을 계기로 1994년 모스크바에서 첫번째 세계 음악캠프를 개최했다. 학생들을 인솔하여 모스크바에 머물면서 오전에는 교육과 연습, 오후에는 차이코프스키 경연대회를 참관하는 등 학생들에게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주었다. 이 캠프는 다음 해인 95년 부다페스트에서, 97년 이태리에서, 또 98년 북경에서 이어졌다.
음악캠프와 함께 리즈마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학생들에게 악기 연습과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시키고 1992년부터 매년 뉴욕청년음악회를 개최하여 지난 해 10회까지 연주회를 가졌다.
학원을 정식 대학으로 인가받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육 계획과 교수진, 교육 목표를 인정받아야 하는데 특히 엄격한 것이 도서관 시설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대학을 평가하는데 여러가지 기준이 있지만 도서관에 얼마나 장서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한다.
그는 1차 신청에서 도서관 때문에 인가를 거부 당했으나 요건을 다시 구비해 인가를 받는데 성공했다. 현재 이 대학은 뉴욕주립대학과 도서교환 프로그램도 갖고 있다.
롱아일랜드 음악대학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는 미국의 유명인사들이 재단 이사회에 많이 참여하고 있는 점이다. 대학 경영은 한인인 김 학장이 맡고 있지만 이사들은 대부분 미국인들이다. 뉴욕주립대의 부총장인 조지 스테파노 박사가 이사장이며 이사로는 카터 전 대통령의 주치의였던 하바드 의대의 그레고리 프리치요 박사, 줄리아드 음대의 옥사나 야블론스카야 교수 등 실력파 인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모두 김 학장이 삼고초려로 인연을 맺은 인사들이다.
그가 이와같이 음악 교육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집안사람들의 이해와 도움이 컸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편이 적극 격려해 주었고 특히 시댁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시아버지인 김운용 IOC위원이 음악을 좋아했고, 시누이도 피아니스트이기 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해 주고 후원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제 미국 음악계에서 마당발이 되었다. 음악공부와 연주생활을 계속 했더라면 지금쯤 바이얼리니스트로도 성공 했겠지만 음악가의 꿈을 접고 교육자로 전환한 그의 인생은 그에 못지 않은 성공을 향해 달리고 있다.
그는 전국음악협회 회원이고 뉴욕주 음악학교협회 회원이다. 뉴욕주 음악학교협회는 초중고생의 음악실력을 평가하여 성적을 대학 입시에 반영하고 우수한 학생에게 연주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그는 이 테스트의 심사위원이기도 하다.
김 학장은 “이제 시작”이라면서 4년제 음대를 인가받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대학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다”는 그는 말만 앞세우는 일이 될까 걱정돼서 인터뷰에서 내용을 털어놓지 않는다.
다만 그의 말에서 드러난 한 가지 야심적인 프로젝트는 세계적인 음악 경연대회를 창설하여 세계적 음악가를 발굴하고 한인 음악도의 등용문 구실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앞으로 그의 활동이 우리의 관심을 모으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이기영 본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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