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서
▶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들에 핀 장미꽃의 허리를 작신 분질러 집으로 가지고 온다. 철사줄로 꽁꽁 묶어 거꾸로 매달아 놓고 생머리 곤두세우는 스프레이 뿌려가며 바싹 말려서 안방 꽃병에 꽂아놓고 감상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비바람 몰아치는 광야에 홀로 핀 장미꽃을 그대로 놓아두고 감상하는 경우도 많다. 이것이 바로 고미술이 추구하는 정서라고 본다.
골동세계에 입문하기 전, 그 문턱에 서서 골동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차분하고, 고전적이고, 탐구적인 정서가 아쉽다고 전 회에서 말한 바 있다. 이런 정서를 바탕으로 골동품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골동품의 생성 과정을 살펴 본다.
골동품이야말로 생겼다 없어지는, 아니면 서둘러 미련 없이 던져버리는 일회용 또는 시한부 생산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골동품의 탄생
‘골동’이라는 어원은 고대 중국, 그것도 시골에서 사용하던 말이다. 쓰던 물건을 그대로 계속해서 쓰자니 진력이 나고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깝기도 한 그런 생활용품(또는 장식품), 한 마디로 잡동사니를 일컫는 속어이다. 그런데 이런 잡동사니(골동품)가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는 마루 밑이나 창고 구석에 쌓이고 세월이 흐르면서 이상한 관록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조상을 연상시키는 향수물로, 이 시대와는 다른 특이한 형상이, 거기에서 풍겨나오는 별난 고전미 등, 이것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애착과 소유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데 충분하였다.
이런 골동에 대한 소유욕은 그 물건에 대한 교환가치를 생성시킨다는 것은 당연하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골동품은 유럽에서 말하는 앤틱(Antiques)의 개념, 즉 옛 조상들이 쓰던 폭넓은 생활용품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후 장사속에 밝디 밝은 중국인이 구닥다리를 고부가가치의 상품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
노인 공경과 조상 숭배 사상이 강한 중국인, 거기에다 잡다한 귀신 신앙은 골동품 가운데 많은 것들이 토속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받기도 했다.
■조선의 도공
한국에서의 골동품에 대한 개념은 중국과 또 다르다. 한국에서 골동품이라는 대상물이 생긴 것은 아마 고려청자가 생산되기 시작한 때부터 일 것이다. 물론 고려청자 이전부터 중국에서 도자기가 수입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궁중이나 일부 사대부에 한정됐다. 나머지 계층에서는 질그릇이나 목기를 사용하였다. 처음부터 고려청자는 집안의 귀중품이요 보물로 자리잡기 시작한 한국 골동품으로서 팔고 사는 상품이 아니었다.
사대부 간에, 좀더 넓혀서 양반사회에서 정을 서로 나눌 때 정표로서 주고 받았던 것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국시 유교사상에 어긋난다 하여 고려청자의 생산을 금하게 되자 장안의 고려청자는 안방마님의 장롱 깊숙히 파고드는 보물로 변신해 갔다.
장롱 속의 골동 고려청자는 아녀자의 속곳으로 싸서 보관했다 한다. 이유인즉 고온으로 구워낸 청자의 열기가 아랫도리의 냉기를 없애주어 잠자리 금슬을 한층 돈독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골동품이 상품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1592~1600)때 부터이다. 임진왜란 8년 동안 후반 4년은 도자기 전쟁이라고 할 정도로 왜군들은 도자기 약탈과 도자기공 납치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왜군 좌장군 고니시 유기나가(小西行長)는 도공 납치와 도자기 약탈을 전담하는 별동대까지 운영할 정도였으니, 가히 그 광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
왜군들이 싸움 보다는 고려청자, 조선백자(이조백자), 분청사기에 미쳐 돌아간다는 소문은 널리 조선 팔도에 퍼져 나갔다. 도자기는 숨기 시작하고 왜군들도 뺏고 훔치는 행위가 어떤 한계점에 도달하자 돈을 주고 사기 시작하였다.
도공도 산속 깊이 숨어버리고 납치도 불가능하게 되자 몇년 동안 일본에 가서 도자기를 굽고 다시 한국에 돌아온다는 일종의 고용계약 형식으로 돈을 주고 도공을 모집하였다.
전쟁 중에는 특히 적의 치하에서는 적에 빌붙어 이권을 챙기고 돌아가는, 이름하여 전쟁모리배들이 있기 마련이다. 왜군으로부터 선돈을 받고 조선의 도공 수색에 앞장선 조선의 거간꾼들은 조총으로 무장하고 도자기 가마터나 산속을 이 잡듯이 돌아다녔다. 이런 와중에서 슬픈 일이지만 상당수의 도공들이 일본에 가기를 자청하고 나섰다.
당시 도공들의 신분은 관비에 속하였고, 관비에 속하지 못한 변방의 도공들은 천민에 가까웠다. 이런 도공들에게 신분을 보장하고 높은 보수를 약속하고 몇년 만 일본에 가서 도자기만 구워준다면 다시 고향에 돌아올 수 있다는 왜군들의 제안은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게 하는데 충분하였다.
그 중에는 양반 계급에 대한 반발이나 양반 사회에서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신분상의 제약을 뛰어넘기 위해서 현해탄 건너기를 택했는지도 모른다.
■통곡하는 도자기
임진왜란 때 남원에서 납치되어 일본에 끌려간 조선 도공의 후예로서 일본 사쓰마야기(도자기)의 일인자인 심수관(沈壽官)은 가고시마 나애시로가와(鹿兒島苗代川)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나애시로가와’에서 조금 떨어진 해변가에는 두 개의 조선식 무덤이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조선 도공의 무덤이다. 이 무덤에서 똑바로 바라다 보이는 곳이 조선땅 경상도 청송이라 한다.
10년 20년 고향으로 돌려 보내주겠다는 약속이 여러 차례 빗나가고 이제는 그 기대 마저 막막해지자 조선의 도공 두 사람은 불길이 이글거리는 도자기 가득한 가마속에 몸을 훌쩍 던지고 말았다. 1,000도가 넘는 가마 속에서 뼈인들 온전하겠는가! 나는 묘지 앞에 엎드려 엉엉 소리내어 한없이 울었다.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두 조선의 도공이 몸을 던져 한 많은 인질생활을 청산한 그 가마에서 구워낸 도자기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보통 잘 구워낸 도자기에서는 두드리면 예리한 금속성 소리가 난다. 그런데 이 도자기에서는 튕겼을 때 금속성 음이 나오지 않고 사람이 우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마치 에밀레종 소리와 같이 말이다.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고향이 그리워 그 한을 품고 가마속에 뛰어 들었는데 그 한이 어찌 육신과 같이 타서 재로 변할 수 있단 말인가.
언젠가 도공 심수관이 서울에 와서 한풀이 한 말을 나는 기억한다.
“여러분, 일제 36년이라는 말, 이 땅에 와서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 앞에서는 일제 36년 너무 하지 마십시요. 이 사람에게는 36년이 아니라 360년이랍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전라도 남원에서 끌려온지 360년. ‘창씨 개명’을 마다하고 심씨 성을 가지고 도자기를 구워 온 17대 심수관 앞에서 너무 36년 말하지 마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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