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프리카의 킬링필드, 르완다를 가다’ (4)
▶ 김평육 목사 (CLWMF)
▲무중구 실링기
살인과 약탈이 빈번하다는 난민촌 근처 야산에다 설치한 텐트에서 탄자니아인들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탄자니아 수도 다르(Dar)에서 온 전도단은 2개의 텐트를 설치했는데 한 곳에서 밤늦도록 기도회를 가졌다. 다른 빈 텐트에 혼자 누워 잠을 청했지만 온갖 상념이 떠올라 이리저리 뒤척이기만 했다. ‘뱀이나 다른 동물이 들어오면 어쩌나’, ‘난민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약탈을 당하기라도 하는 것 아닐까’하는 걱정이 태산 같았다.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아침을 맞아 다시 난민촌으로 갔다. 이젠 담력도 생기고 난민촌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터득해 나름대로 요령이 생겼다. 이미 식량 배급소에는 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성인 한사람이 일주일에 콩 1kg과 옥수수 1kg을 받는 게 전부였다.
한 난민청년이 식량 자루를 내게 보여주며 이것으로 일주일을 버텨야 한다고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난민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더욱 커져만 갔다.
난민촌을 그냥 겉만 취재하기보다는 깊이 들어가 이들이 사는 모습을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응가라(Ngara)지역에는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피난 온 70만 명의 난민이 살고 있었는데 초막마다 사람들이 병들어 누워 있었다. 그 처참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겠다고 카메라를 들이댈 수는 없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백인을 무중구라 불렀다. 동양인인 필자도 무중구로 보였는지 수많은 어린이들이 따라와 손을 내밀며 ‘무중구 실링기’라고 말했다. 탄자니아의 화폐단위가 실링이었는데 ‘돈을 달라’는 뜻이다. 전세계가 살인집단으로 규정한 후투족 난민이었지만 어린이들은 천진난만하기만 했다.
난민촌 취재를 시작한지 만 12시간이 넘으면서 이곳 저곳을 살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난민촌 사람들이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니 순수하기만 했다. 당초 이튿날까지 난민촌을 살펴 볼 예정이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생각에 전도단과 작별하고 난민촌을 빠져 나왔다.
지도를 펴놓고 행선지를 고민하다가 므완자(Mwanza)로 가기로 했다. 마침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므완자행을 물었더니 응가라(Ngara) 타운에 내려주면서 카방가(Kabanga)라는 타운을 거쳐서 가라고 알려주었다. 응가라는 탄자니아의 넓은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고산지역에 위치한 타운이었다.
다시 카방가로 향하는 길에서 기다렸다가 트럭을 얻어 탈 수 있었다. 카방가행 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며 트럭 운전사가 내려준 곳은 나중에 알고 보니 부룬디, 르완다, 탄자니아 세나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오지중의 오지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 신부가 타고 가는 카방가행 승용차를 만날 수 있었다. 인도사람이 신부와 동행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카방가 경찰서를 찾아가던 길이었다. 인도인의 동생이 일주일 전 이 지역을 지나다가 산적을 만나 살해당했는데 경찰의 수사 촉구를 부탁하기 위해 돈을 전달하러 간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카방가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께. 지나가는 차량도 하나 없는 적막한 곳이었다. 워낙 약탈이 심해 이 시간에는 차량조차 통행을 꺼려한다니 난감했다. 므완자로 가야 하는데 오히려 거꾸로 오지로만 자꾸 들어가고 있었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길에서 서성거려 봤지만 결국 차를 만나지 못하고 날만 어두워졌다.
이번 취재를 다니며 느낀 점은 아프리카의 어느 곳이든 돈이 될만한 사업은 대부분 인도인이 장악했다는 것이다. 지구에서 가장 후미진 곳이라고 느껴진 카방가에도 인도인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부모 때 정착해 아프리카인과 다름없었지만 이들 인도계가 므완다행 버스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가 도착하던 날 버스가 떠나 일주일 뒤에야 다음 차편이 있었다.
여인숙도 급했지만 아침부터 밥을 굶어 뱃속에서는 ‘꼬르륵’하는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겨우 찾은 여인숙은 말이 여인숙이었지 편의시설이 전혀 없었다. 먼지를 뒤집어쓰면서 하루 종일 길을 달려왔는데 샤워는 커녕 세수할 물조차 없었다.
방 출입문도 사과상자로 엉성하게 만든 것이어서 문틈으로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였고 발로 툭 차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았다. 여인숙에 누워 있으려니 두려움과 외로움이 밀려왔다. 가족들 생각에 마음은 더욱 답답했다. 아예 눈을 감고 잠을 청하는 게 상책이었다.
밖에서 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잠을 깼다. 서둘러서 배낭을 챙기고 밖으로 나와 보니 헛소리를 들었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은 오전 6시. 여인숙 앞에서 차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지만 여전히 마을은 조용하기만 했다.
내 모습이 처량해 보였는지 마을 청년 하나가 다가와 서툰 영어로 친절을 베풀었다. 이 마을에 천주교회가 하나 있는데 매일 아침 8시에 신부가 어디론가 가는데 차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청년의 안내로 천주교회로 가니 마침 신부님 한 분과 수녀 3명이 어디론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부는 자기가 가는 곳까지만 가면 차량 통행이 많다며 합승을 허락했다.
어딘지 모르는 숲 속 길을 따라 서너 시간을 달린 후에 도착한 곳은 어제 내가 길을 떠났던 베나코(Benaco) 난민캠프였다. 아니 이럴 수가? 당초 오늘 이 시간에 난민캠프를 떠날 계획이었다가 하루 먼저 출발했는데 다음날 나를 다시 이 자리로 돌려놓으신 그분의 계획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분은 내가 난민촌에서 무엇인가 일하기를 원하신다는 예감이 들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UNHCR의 수송트럭이 하나 있어 행선지를 물었더니 카라괴(Kragwe)로 간다고 하였다. 카라괴는 한번 가 본적이 있지 않은가? UN트럭은 응가라와 카라괴를 잇는 깊은 산악지역의 산등성을 따라 달렸다.
먼지가 펄펄 나고 민가조차 없는 한적한 곳이어서 산적이 많이 나타난다는 지역이었다. 길옆에 강탈당한 수송 트럭이 팽개쳐진 채 물건 박스들이 주위에 어지럽게 널려져 있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트럭에 몸을 싣고 가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이 살인집단으로 외면한 후투족 난민촌에서 이들과 함께 생활하면 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일 이럴 수만 있다면 목회자에게 난민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황금어장이 아닌가.
카라괴에 도착하자 숨통이 트이는 것만 같았다. 이미 한번 와 본 곳이어서 마음도 편안했다. 여기서 부코바로 가는 차를 찾아야 하는데 이미 늦은 시간이어서 대중교통은 끊겼다. 고물 랜드로버 한대가 있어 행선지를 물으니 마침 부코바로 간다고 했다. 이 차를 빌린 사람에게 허락을 맡아야 했는데 차만 탈 수 있다면 그건 큰 행운이었다.
마침 한 동양인이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걸어오고 있었다. 입고 있는 옷이 고급스러운 걸 보니 한국사람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었다. 금광업을 하는데 원석을 캐기 위해 이곳까지 왔지만 너무 고생이 많았다며 돌아갈 길을 생각하니 막막하다고 했다.
얼마나 힘든 여행이었는지 이 사람은 자신의 코에서 피가 흐르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같은 한인을 만난 반가움에 그 동안 당했던 고생들을 늘어놓는 이 사람에게 코피가 흐른다고 알려줬더니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이 사람을 위로하며 한번 가본 적이 있던 부코바의 여인숙으로 안내했다.
어느덧 내 안에서는 아프리카에 대한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