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4) 뉴욕 라커펠러 센터
R.C.A 빌딩, 라커펠러 센터(Rockefeller Center) 등이 있는 뉴욕에 살면 라커펠러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할 듯하다.
존 D. 라커펠러는 뉴욕주 이타카시 북쪽 카유가 카운티(핑거 래이크)에 있는 리치포드(Richford)에서 농사군인 윌리암 애버리 라커펠러의 아들로 태어 났다.
윌리암 애버리 라커펠러는 역마살이 있어 항상 떠돌아 다닌데다 동네의 평판도 좋지 않았다. 애버리 라커펠러는 정실 부인 엘리자(Eliza)와 결혼하기 전 자기집에 드나들던 미녀 파출부 낸시 브라운과 동거해 루시라는 첫딸을 낳았다. 이후 정실 부인에게서 존 D. 라커펠러를, 낸시 브라운에게서 딸을 하나 더 낳았다. 농사꾼이 밖으로 돌고 바람만 피니 늘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엘리자는 남편의 방랑벽과 바람기를 종교로 극복했다. 엘리자는 진실한 침례교 신자로서 아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해 신앙심을 갖도록 했다. 이것은 훗날 라커펠러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크게 작용했다. 친구는 적고 비전은 넓어져 자선을 많이하는 인물로 만든 것이다.
체격이 좋고 잘 생긴 라커펠러는 모라비아시로 이사해 1,000달러를 주고 땅 92 에이커를 구입, 농사를 지었다. 장래가 보이기 시작했지만 말썽만 부리는 아버지를 피해 오하이오주로 벼락치기 이사를 했다. 이것이 라커펠러에게 엄청난 부를 이루게하는 계기가 됐다.
라커펠러는 14세때 어머니의 주선과 채근으로 정유회사의 클리브랜드 부두에서 경리과 급사로 들어갔다. 라커펠러의 스탠다드 오일 회사가 태동하려는 첫 걸음이었다.
▲미국 巨富들의 출생과 한국의 양반들
라커펠라는 1839년에 태어났다. 이 시기는 나중에 미국을 대표하는 거부들이 출생하던 무렵이기도 했다. 이스턴 철도회사의 주인인 제이 굴드가 1836년,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가 1835년, 유명 은행 J. P. 모간의 창설자 J P 모간이 1837년에 각각 태어났다.
이들은 성년이 되어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야합도 해가며 자기 사업을 키워나갔다. 한국은 이 당시 양반과 정치가들의 매관매직이 절정에 이르러 민중이 도탄에 빠져, 홍경래의 난과 동학난을 겪는 시기였다.
라커펠러보다 나이가 많지만 라커펠러와 야합을 가장 많이 해온 사업가로는 코넬리우스 밴더 빌트가 대표적이다. 그는 현재의 그랜드 센트럴 기차역을 건설하고 운송업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는 뉴욕의 허드슨 강변(9W도로변)에 아름다운 집을 지은데 이어 로드 아일랜드주 뉴포트시에 대 저택을 건설, 여행객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스탠다드 오일과 반 독점법률문제
라커펠러의 스탠다드 오일 회사는 펜실베니아 서북부 티투스빌( Titusville)에서 최초로 시추해 오하이오주의 클리브랜드시로 원유를 수송했다. 이곳에서 정유한 뒤 오대호 지방의 호수를 이용하여 운송을 하였다.
이때 철도가 생겨 밴더빌트의 기차가 원유를 아주 싸게 수송해 주어 경쟁자들을 물리쳤다.
두 사람은 야합을 계속하다 결국 독점 금지법에 철퇴를 맞았다. 현재 독점금지법에 의해 괴로움을 받고 있는 대표적 기업이 빌 게이트가 운영하는 마이크로소프트사다.
▲라커펠러의 자손들
존 D. 라커펠러는 영국 귀족이며 하원의원인 스펠만 백작의 딸 로라 스펠만과 결혼했다. 존 D. 라커펠러의 아들로는 부친의 뒤를 이은 존 D. 라커펠러 주니어와 뉴 햄프셔의 유명한 다트 머쓰 대학을 나와 뉴욕주 지사 및 포드 대통령때 부통령을 지낸 넬슨 라커펠러가 있다.
존 D. 라커펠러 주니어의 아들로 장손인 존 라커펠러 4세는 하바드대, 일본 동경대 대학원을 마친 뒤 평화봉사단에서 일했다. 이후 미국에서 제일 가난한 주인 웨스트 버지니아에 정착, 일본의 도요다 자동차 회사를 유치해 주민들에게 일자리를 안겨주었다.
그는 4번의 주지사를 거쳐 현재 상원의원으로 활약 하며 어린이 의료보험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 장차 민주당의 대통령감으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라커펠러의 인간성
억만장자의 인간성이 과연 어떤지는 만인의 관심거리다. 그의 성격은 괴팍하기로 유명하다.
별로 말이 없고, 차가우면서도 어린애 같은 순진성도 가졌다. 그는 평생 두 가지만은 확실하게 했다. 첫째는 하느님을 믿는 것 둘째는 자선하는 것이었다. 남과의 거래에서 반드시 이득을 보아야지만 물러나는 철저한 장사꾼이었다.
그리고 사업상 경쟁자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완전히 밟아버려 다시 재기할 수 없게 하는 성격이었다. 돈을 너무 많이 벌어 어디에 쓸지 모를 때 게이트라는 침례교 목사를 만나 그의 충고로 기부하기 시작했다. 시카고 대학(University of Chicago)에도 건물을 지어 주고 총장인 하퍼 박사와 교류하였다.
뉴욕의 라커펠러 센터를 건설할 때 하루는 공사 진행 상황 등이 궁금했다. 건설현장을 혼자 찾은 그는 널빤지 구멍을 통해 안을 들여다 보다 경비에게 제지당했다.
"여보게 경비원, 내가 이 건물을 짓고 있는 라커펠러일세"라고 말했다.
그러자 경비는 "아, 그러세요. 나는 루즈벨트 대통령이지요. 자, 어서 비켜 서시지요."
기가막혀 하는 라커펠러 앞에 경비과장이 황급히 달려와 라커펠러를 안내했다. 그 다음날 경비는 승진하고 이 때부터 공사장 주위를 친 널빤지는 중간중간 구멍을 뚫어 행인의 궁금증을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것이 확산되어 오늘날에도 전 세계 각종 공사장에는 구멍 뚫린 보호책이 쳐지고 있다. 라커펠러는 자신의 이재술은 하느님이 주신 은혜라고 항상 자랑했다. "나는 일반이 모르는 방법으로 돈을 벌며 그 능력은 오로지 하느님이 주신 능력과 지혜일 뿐"이라고 항상 말했다.
돈벌이에 빠져 있던 어느날 게이트 목사를 만났다. 게이트 목사는 "자선으로 나가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이 벌려서, 이대로 가면 이 돈이 당신과 자손들의 장래를 망칠지도 모릅니다. 빨리빨리 기부하셔야합니다."하고 충고했다. 라커펠러는 교회뿐 아니라 일반 대학에도 많은 기부를 했다.
라커펠러는 50세에 은퇴하고 100살까지 살기로 작정하고 의사의 충고대로 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라커펠러는 운동 중에서도 골프를 제일 좋아 했다. 때로는 하루 종일 골프를 치기도 했다.
그와 함께 골프를 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나 라운딩할 때는 절대로 사업얘기를 안하겠다는 약속을 꼭 받아냈다. 그가 골프를 치는데 든 비용은 연평균 약 50만 달러에 달했다.
라커펠러는 어마어마한 저택이 없다. 그저 평범한 집에서만 살았다. "자연이 아름다운데 집에 갇혀 살 필요가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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