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5) 뉴욕 카네기 홀
철강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는 스코틀랜드의 언펌라인이라는 조그만 마을에서 직조공의 아들로 1835년 11월 15일에 태어나서 어린시절 억세게 가난한 유년시절을 보내다가 13세 때 가난이 싫어서 아버지를 따라 1848년에 미국에 이민와서 펜실베니아주, 앨레게니에 정착했다.
이민 오자마자 목화공장에서 잡일을 보며 그 당시에 새로운 기술인 전보 치는 기술을 빨리 습득하자마자 웨스턴 유니온 전보회사에서 펜실베니아 철도회사에로, 목화공장에서 별볼일 없던 앤드루를 전보치는 기술자로 철도회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밤에는 피츠버그시에 가서 야간대학을 다니면서 성실하게 일하는 그는 피츠버그의 철도국장인 토마스 스캇의 눈에 들어 철도회사 주(주)에 투자하는 방법도 배우고 우드럼 슬리핑 카 회사의 사장인 테드 우드롭이 카네기를 설득하여 승진을 계속하는 그를 현재 철도회사에 식당차(먹고 잘 수 있는 차)를 설치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권고로 사업을 같이 하다가 그 사업이 철강 기술에 크게 좌우되는지라 그는 철강회사를 피츠버그에서 시작하니 비로소 철강왕의 큰 첫발을 내디딘 것이라 하겠다.
어릴 때 가난하여서 정식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고, 평소에 지식을 갈구하며 야간대학에서 고생하며 배우는 그가 교육의 중요성을 뼈아프게 느껴왔고 특히 예술과 교육에 대한 자선헌금에 관한 한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헌금자이리라 생각된다.
65세에 퇴직하면서 83세에 사망하는 날까지 자선하는 것도 사업하듯이 열심과 정성을 다하는 그의 모습은 거룩하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65세에 퇴직하면서 그가 평생을 이루어놓은 (U.S. Steel Corporation(미국철강회사)을 은행가인 친구 J.P. Morgan에게 40억달러에 팔고 이 돈도 90% 이상을 자선금에 내어놓아서 사회 공헌에 헌신하였다.
동 시카고, 인다애나주 헤몬드市와 게리市, 동 미시간 호수를 따라서 발전된 도시가 오로지 이 철강회사 때문에 생계를 유지하는 수만명의 종업원과 그의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져 왔던 US Steel은 현재는 일본과 한국의 싼 철강의 수입으로 대부분 문을 닫고 폐업중이다.
이곳을 지날 때마다 그 웅장했던 옛날 모습을 상상해 보며 기업 변천과 직결된 종업원의 앞날이 기업의 흥망에 따라 이렇게 비참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고 기업경영자들은 이곳을 한번 여행하며 그들의
사명감이 어느 정도인지 자문자답해 보길 바란다.
카네기의 평생 소원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서관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는데 그가 세계 각국에 영어권 나라에 도합 2,509개의 도서관을 지어주었고, 예술을 사랑하는 그는 1891년에 뉴욕에 그 당시 돈으로 2,000만달러를 들여서 카네기홀을 지어주었다. 이곳에서 피터 채이코프스키, 이골 쉬트라빈스키, 모리스 라벨, 조지 거쉬운 등이 연주회를 가졌다.
또 1900년도에 카네기 멜론 대학을 200만달러로 지었고 그 학교는 곧 1967년에 700만달러로 카네기 공대로 발전한 유명한 대학으로 예술과 컴퓨터 그래픽과 과학에 선두에 서는 대학으로 우리 동포 자녀들이 선호하는 대학이 되었다.
1919년 8월 11일 매사추세츠주의 셰도우브룩에서 기관지 폐렴으로 사망할 때까지 그가 한 총 헌금은 그 당시 돈으로 3억5,000만달러였다. 목화공장에서 한 주일에 1달러25센트씩 받던 카네기가 이렇게 위대한 사업가로 변신하게 된 큰 동기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의 한국인 동포가 65세에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어서 카네기 정도는 못되지만 많은 돈을 자선사업에 쓰는 사람이 있다. 그는 현재 교포은행의 대주주로 있으며 심지어는 북한 민족의 외국유학비용까지 장학금을 지급하는 훌륭한 동포가 있어 항상 자랑거리로 외국인에게 얘기를 했는데 이제부터는 그는 한국의 카네기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카네기는 뉴욕의 부자 상인의 딸인 Louise Whitfield와 1886년에 결혼하였고 부인도 남편의 뜻을 따라 훌륭한 자선 헌금의 내조자로 알려져 있고 1897년에 딸 마가렛을 낳았다. 카네기는 “선생이란 직업은 가장 훌륭한 최고의 직업인데 이 직업에 대한 보수가 우리 회사 문서배달원 만큼도 못 받는다”고 개탄을 하고 그들의 퇴직금과 보험을 위해서 3억달러를 헌금
했다(1938년부터 독립운영 TIAA-CREF).
여러 동포들의 자녀들이 대학 장학금을 신청해서 공짜로 주는 장학금인 펠 그랜트(Pell Grant)- Claiborn Pell 상원의원의 이름을 따서 Pell Grant라 한다. 허나 이 모든 것이 카네기 재단에서 10억달러씩 지불해 주는 것이다.
동포나 외국인들이 이곳에서 대학에 입학하려면 소위 TOEFL Test란 것을 본다. 또 대학을 입학하기 위해 SST 또는 ACT, 대학원을 가려면 GRE, GMAT, LSAT 등을 거쳐야 되는데 상급학교 입학 수능시험에 해당되는 제도로서 뉴저지의 프린스톤에 본사가 있는 Educational Testing Service(ETS)에서 시험을 관장하는데 이 시험을 연구 발전시키는 재단이 바로 카네기 재단이다. 즉, 카네기 재단의 돈으로 운영한다는 말이다.
또 우리 아이들이 즐겨보며 어린이 교육에 좋다는 세사미 스트릿(Sesame Street) 교육영화도 카네기 재단의 돈으로 만들어진 것을 알고 필자도 놀라웠다. 철저하게 연구하고 돈을 주는, 또 그 결과까지 가늠하는 그들의 지혜에 감동을 한다.
1911년에 Carnegie Corporation of New York이라는 재단을 설치하고 자선 헌금을 어디에 누구에게 줄 것인가를 연구하며 교육, 예술, 과학, 세계평화 연구에 이르기까지 재단의 돈으로 연구시켜 정확하게 재단의 돈이 쓰여질만한가를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하다는 교육기관에 무조건 던져주는 식이 아니란 말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자선헌금을 격려할 목적으로 카네기 메달을(카네기의 흉상) 만들어 표창하고 있다.
이 표창을 받은 사람으로 Gates Family(빌 게이츠 가족재단), 라커펠러 가족 재단, 케이블 텔레비전 회장 테드 터너, 한국의 IMF 때 한국 부실기업의 M&M을 주도하던 국제 재정금융가 조지 소로소(교육기관을 위해 매년 약 5,000만달러씩 헌금) 등이 이 표창을 받았다.
자그마한 키, 5피트2인치의 카네기가 생각과 포부만은 온 세상을 감싸고도 남을 만큼 거인(巨人)이었음을 감탄하며 그의 업적이 지금도 생생히 약동하며 카네기의 위대한 뜻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카네기 한 사람의 업적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행복과 평안에서 실제적으로 영향을 끼쳤는가. 카네기가 퇴직하기 전에 뉴욕타임스에 ‘富의 복음
서(Gospel of Wealth)’라는 수필을 기고하였다. 왈 “다음은 부자들의 해야 할 일이다.
첫째 허세부리는 생활을 하지 말고, 또 허세 부리지 말고 자기에게 딸려있는 가족들의 정당한 필수품을 도에 넘지 않도록 준비해 주어야 하고서 남은 것은 그 사회에서 그 남은 재산을 잘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나 기관에 희사하는 것이 부자들의 의무인 것이다”도서관을 짓고, 주춧돌에 “모든 사람에게 무료로(Free to the people)’라는 글자를 카네기가 직접 써 넣었다.
한인사회의 골프대회나 무슨 파티가 있으면 번쩍번쩍하는 고급 자동차가 줄을 짓는 것을 보면서 우리에게는 왜 Korean Carnegie가 없는가 하고 생각해 보며 언제인가는 그런 독지가를 하나님 잘 믿는 우리 민족에게 보내 주시겠지, 라고 생각해 본다.
<윤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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