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서 (13)
▶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1989년 일본 교토(京都)에서 고려 찻잔 전시회가 열렸다.
유명 사찰이나 귀족 가문에서 400년 이상 보물로서 소장해 온 고려 찻잔은 16세기 무렵의 것들로서 모두 분청사기(일본명 미시마)이다. 전시 마지막 날 특별 초청인사(한국중앙박물관장 정양목 참석) 300명이 참여한 심포지움 개최 인사말을 통해 동경 국립박물관장 하야시는 이렇게 말했다.
▶ 이 미시마(三島) 찻잔은 조선시대의 막사발이긴 하지만 우리 일본인들에게는 신앙 그 자체이며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무한히 기쁘게 나아가 숭고하게 하였습니다. 이 찻잔들은 우리에게 보물 이전의 신(神)과도 같을 것입니다.”
▶ 한국의 미(美)를 말할 때
한국의 고미술사가들은 무엇이 ‘한국의 미’냐고 물어올 때 서슴없이 말한다. “분청사기를 보라! 분청사기가 대답해줄 것이다.”이런 시각은 고미술계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계에서도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고려청자가 추구하던 완벽주의를 거부하고 늘 바라보고 그 속에서 생활하는 뒷동산에 초가삼간을 그대로 재현시킨 분청사기!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비색 고려청자를 마다하고 거칠면서도 당당한 청산의 백계수를 흙과 불로 빚어 만든 분청사기! 누룽지 맛에 숭늉 냄새가 물씬 나는 분청사기야 말로 만고에 조선의 멋이요, 맛이 아니겠는가! 이런 분청사기가 일본인을 미치게 만든 것이다.
내가 동경에 있을 때 어느 중견작가의 집으로 방문한 일이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는 나에게 보여줄 것이 있다면서 서재로 안내한다.
하얀 장갑을 끼고 나무상자 속에서 꺼내놓는 것은 분청사기 찻잔이었다. 내가 손으로 만지려 드니까 ‘잠깐’ 하면서 이중으로 된 상자 뚜껑속에서 여분의 하얀 장갑을 꺼내 준다.
설명인 즉, 자기 가문의 가보라는 것이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토록 분청사기를 선호하고 극찬하면서 신기(神器)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 받들어 모시게 된 역사적 배경이 매우 궁금하다.
16세기 후반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1592~1600)의 후유증으로 경제위기 등 사회가 혼란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 때 센리큐(千利休)라는 유명한 고승이 일본 역사에 나타났다.
이 센리큐 고승이 일본사회에 새로운 가치관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그 때까지 일본인이 추구하던 인생관은 화려한 아름다움과 격식이 뚜렷한 완벽주의였다. 이런 세태 속에서 인생의 행복이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는데 있다. 화려한 것 보다는 아담하고 소박한 것, 격식에 얽매이는 것 보다는 자율적인 개성이 존중되어야 한다고 설파하고 나섰다.
이런 센리큐의 신사조운동은 더불어 차를 마시며 자연을 이야기하는 다도회(茶道會)를 통해서 대중화 되어 갔다. 이 때 조선의 분청사기 찻잔이 다도회의 귀공자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에서 약탈해 온 분청사기가 일본 상류사회에 나돌기 시작한지 오래이다. 분청사기가 풍기는 그 소박하고 투박한 자연미야 말로 센리큐가 주창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다도회의 일등 찻잔으로 등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특히 통치자 도요도미 히데요시(1590~1603)가 센리큐를 적극 후원하였다. 다도회를 수스로 개최하기까지 하였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히데요시’는 천한 계층의 출신이다. 항상 이것이 마음에 걸렸다. 거기다 쥐상으로 얼굴도 못났다. 이런 히데요시의 혼자만의 속앓이를 센리큐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다도회의 귀공자로 등장한 조선의 분청사기가 깨끗이 해소해 준 것이다. 자신과 너무나 닮은 미시마(三島.분청사기)가 아닌가.
▶ 청바지 사기
만일 동포 가운데 도자기를 수집하고저 하는 골동 초보자가 있다면 한 번 분청사기를 시도해 보라고 말한 바 있다. 바야흐로 지구촌의 사람들은 격식 있고 화려한 것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이런 현상은 가장 화려함을 추구하는 여성의 의상에서 너무 단적이요 당돌하게 나타나고 있다. 제일 화려한 의상이 추구하는 초점은 얼마나 과감하게 맨살을 노출시키는 데 있다. 그것도 최상의 명분과 최고의 찬사를 보내면서 말이다.
그런 여성의 맨살이란 무엇인가! 바로 자연이다. 아슬아슬한 맨살이란 바로 원시점이 아니겠는가. 왜 맨살인가. 그것은 자연과 같이 생동하는 영원한 미완성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 맨살이라는 자연이다.
화려한 완벽이 눈앞에 다가올 때 사람은 그 화려함과 완벽을 감상하고 찬사를 보내기에 앞서 숨막히는 답답함에 사로 잡힌다. 때문에 인간은 미완성을 선호한다. 미완성은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킨다. 그것도 나만의 추
리소설을.
분청사기는 세계 도자기 가운데 가장 미완성적인 작품이다. 나만의 취향 속에서 감상할 수 있고, 아니면 나만의 취향에 알맞게 개량할 수 있고, 아니면 그런 분청사기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왜? 분청사기야말로 규격이나 격식 하고는 거리가 먼 자연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가장 한국적인 도자기, 그러면서 미국이라는 다민족 문화권 속에서 거부감을 불러 일으키지 않고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미국속의 골동 도자기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 분청사기다.
나는 분청사기를 접할 때마다 어떤 환상에 사로잡힌다.
아침에 새 옷 갈아입고 나간 막내가 저녁에 흙 덤벙이가 되어 돌아오는 모습, 그 모습을 부지갱이를 오른손에, 왼손에는 고구마를 들고 바라보는 에미의 심정, 새 옷 더럽혔다고 부지갱이로 매타작 하자니 끼니도 굶고 뛰놀고 왔을 막내가 안스럽다. 그렇다고 불쑥 고구마를 내밀 수도 없는 에미의 마음이다.
우리의 도자기 분청사기란 바로 이런 것이다. 나는 분청사기를 청바지 사기라 불러본다.도자기는 도기(陶器)와 자기(磁器)의 준말이다. 도자기는 넓은 의미에서 4 종류로 구분한다.
토기(earthen ware) 점토를 소재로 유약 없이 500도 열로 굽는다.
도기(pottery) 점토를 소재로 유약 첨부 1,000도 이상의 열로 굽는다.
석기(stone ware) 점토를 소재로 1,200도로 굽는다.
자기(porcelain) 돌가루를 소재로 유약을 첨부, 1,300도 이상의 열로 굽는다.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중간에 속하는 분청사기는 점토를 소재로 1,200도 이상의 고온으로 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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