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서 (14)
▶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3세기 말 중국에서 옥색(비취색)의 비법을 터득하고 만들기 시작한 도자기 청자는 역시 중국적이다. 그 취향 또한 중국적이다.
중국에서 옥(玉)은 군자를 상징하는 보물로서 부귀와 죽은 후 극락을 보증하는 신앙적인 대상이다. 고분에서는 많은 옥제품이 발굴되고 있으며 지금도 부모님의 묘에 ‘옥’을 분장하는 것은 그지없는 효도라 생각하고 있다.
옥의 공급은 딸리고 수요는 급증하면서 ‘옥’을 만들면 큰 돈을 벌 수 있을거라는 발상이 생긴다는 것은 상식이다. 마치 중세기 유럽에서 ‘납’으로 ‘금’을 만들어 일확천금을 꿈꾸던 연금술사와 같다. 흙으로 옥을 만들어 보겠다는 중국사람의 끈기는 성공하였다.
가마 안에서 나무가 탄 후에 재가 가라앉으면서 푸른 색의 옷이 입혀지는 것을 보고 놀라 기절 했으리라. 실제로 참나무 재와 소나무 재가 1,300도의 고온에서 녹으면 청록색의 유리색이 나온다. 재 속에는 철분과 ‘실리카나 아루미나’라는 유리 성분이 들어있어 유리 성분의 유리막이 생기면서 옥색과 유사한 비취색이 난다. 이것이 3세기 후반의 일이다.
10세기 후반에 고려청자를 굽기 시작하였으니 청자 비색의 비밀을 가슴에 안고 죽어야 할 이유도 없고 명분도 없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물속을 들락날락하는 잠수함이라고 선생님 한테서 배웠다. 비슷한 이야기다.
■ 자기와 사기
고려청자, 조선백자도 우리 말로 한다면 분청사기와 같이 고려청사기 조선백사기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사기’보다 질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크나큰 오해다. 자기를 만드는 흙(태토)이 돌가루(모래) 성분이다. 자기가 사기임은 너무도 당연하다.
아직까지도 고미술가나 도자기 수집가 가운데 분청사기를 일본어 미사마(三島)라고 부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거기에는 나무라기만 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사실 분청사기라는 명칭은 문헌 어디에도 나와있지 않다. 1940년 당시 개성 박물관장으로 있었던 고유섭(高裕燮)이 처음 붙인 이름이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는 일본사람이 불러온 이름 미시마 그대로 한국에서도 통용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면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와 같은 맥을 이으면서도 고려청자로서의 대접도 못 받고 그렇다 해서 조선백자에도 끼지 못하고 천대를 받았을까!
분청사기는 한(恨)을 품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 조선이 들어서면서 유교를 국교로 정하고 불교는 억압당하고 스님은 중놈으로 전락하였다. 불교신자들의 극락 불공은 고사하고 절간 출입마저 어렵게 되자 스님들이 생존수단으로 구워낸 도자기.
여기에 망한 고려 유민(왕씨)이 역시 생사의 기로에서 살 길을 찾아 스님의 도요지에 찾아들었다. 스님의 불심과 망국의 한이 빚어낸 도자기가 바로 분청사기의 시발이다.
조선의 천민이 그 맥을 이어가고 천주교 박해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간 천주교도들에 의해 또 맥이 이어갔다. 그래서 분청사기를 한(恨)에 맺힌 도자기라고도 한다.
■ 조선백자
조선왕조 건국이념인 유교는 성리학적 세계를 말한다. 검소, 질박, 결백을 추구하면서 내세 보다는 현세를 중시하는 생활 철학이다. 오색 비단과 같이 사치의 전형인 청자를 멀리하고 백자를 선호하고 장려한 것은 당연한 추세라 할 것이다. 여기에다 14세기 후반 문익점에 의해 목화가 이 땅에 전래되면서 거리는 백의(白衣)의 물결이 넘쳐 흘렀다. 밥상은 백사발로 가득 메워지고.
조선백자의 백색은 회백색(灰白色)에서 유백색(乳白色), 설백색(雪白色)으로 변해가고 백자 위에 코발트로 그림을 그리는 청화백자(靑畵)로 발전한다. 백자의 변천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산화동으로 무늬를 그리는 동화백자, 산화철로 그림을 그려넣는 철화백자 등으로 인간의 기교를 백자 위에 만끽한다. 그러다 결국은 청자를 멀리한 결백과 청순함을 무색케 했다.
흙으로 옥(玉)을 만들어 떼돈을 벌어보겠다고 시도한 인간의 욕심 덩어리가 중국청자요, 고려청자라면 인간의 결백과 의리를 흙과 불로 상징화 시켜 놓은 것이 조선의 백자이다. 이런 배경을 알고 고려청자나 조선백자를 수집한다면 또다른 수집의 진국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1976년에 시작하여 1983년에 마무리진 완도 앞바다 해저인양물 발굴작업에서 3만701점의 송나라(960~1279) 때 청자가 인양되었다. 동시에 같은 장소에서 길이 8미터 정도의 목선도 인양되었다. 발단은 이렇다.
새우잡이 인부가 어망에 걸려 올라온 청자대접과 꽃병을 집으로 가져와 대접은 고양이 밥그릇으로 하고 꽃병은 지나가는 엿장수에게 팔았다. 그리고 얼마 후 목포초등학교 교사로 있는 동생이 형님댁에 놀러왔다가 고양이 밥그릇을 보았다. 아무래도 막 굴릴 그릇이 아닌 것 같아 형님에게 사연을 물어보고 보물급임을 짐작하게 되었다. 깜짝 놀란 동생이 문화공보부에 연락하고 문화재 위원들이 현장에 내려와 감정한 결과 송(宋)대의 청자로 판명되었다.
어부에게 준 보상금은 500만원. 당시 국립박물관 1년 구입 예산이 1,500만원이라니 거금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소문이 비밀로 보장될 리 없다. 전국에서 몰려온 잠수부 수백명이 바다 속 청자무덤을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병대 UDT까지 동원하여 경비를 섰으나 역부족이었다.
현재 한반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유물이 나오는 곳은 150여군데나 된다니 당시 도자기 무역이 얼마나 활발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 가운데 대량으로 인양되는 것만 해도 인천 강화도 서산 대천 보령 등지이다.
한때 이 근방 해녀들은 소라나 전복 잡는 것을 뒤로 미루고 청자 건지러 바다속을 휘젓고 다녔다니 골동품의 매력이 얼마나 큰가 짐작이 간다. 인양된 청자는 주로 접시와 대접으로 녹청색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질적으로는 그렇게 상품(上品)은 아닌 것 같다.
한국의 골동문화유산의 80%를 차지하는 도자기를 대할 때마다 좀 더 유산폭이 넓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에 사로잡힌다.
현재 뉴욕에 있는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인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는 한국실이 있다. 솔직히 다른 전시실에 비해 너무나 빈약하다. 도자기는 전체 인류문화유산 가운데 매우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다.
내일의 민족문화유산을 위해 시대별로 문화예술의 창작 개발이 아쉽다. 유럽의 앤틱문화와 같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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