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 부호들의 대저택
▶ (11) 포트 워싱턴, J. 굴드 가
제이 굴드(Jay Gould)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서 뉴욕의 럭스베리 마을(뉴욕주 도로 17번으로 올라가다 캐츠킬 산 밑, 델라웨어 강가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서 태어났다. 유년 고생이 극심했고, 굶주린 배를 잡고 길에서 실신도 여러번 했다.
그는 자그마한 키에 약하고 가느다란 팔뚝을 가진 약골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존 굴드(John Gould)는 큰아들이 캐나다로 가버리고 난 후 실망해 있을 때 작은 아들이 태어나자 중간 이름도 지어주지 않았다고 한다.
“저런 체격으로 농사일을 어떻게 한다?...” 볼 때마다 걱정이 태산이었으나 아들은 체구와는 달리 대담하고 일을 맡기면 반드시 멋지게 처리해 감탄했다. 그는 동네의 간이학교에서 글쓰기와 읽기를 배웠으며 특히 수리(數理)에 능해 후에 계산기를 만들어 부자가 된 같은 반의 버로우(Burough)(버로우 계산기회사)와 함께 수학을 특히 뛰어나게 잘 했다.
여기서 열심히 잘 배워둔 수학 실력이 장차 그를 거부로 만드는 이재술(理財術)에 얼마나 크게 작용할 지는 아무도 예측 못했다. 한번은 인디언 떼거리가 침입, 아버지를 위협하자 모두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 있을 때 13
세의 굴드가 “내 총을 가져와, 빨리”라고 소리치면서 앞으로 돌진했다.
아버지는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가라!”고 했으나 그는 누가 건네준 총을 들고 맨 앞의 건장한 인디언에게 겨누었다. 인디언의 칼이 굴드의 머리를 향해 날아 오는 순간 “꽝!”하는 소리와 함께 인디언은 그 자리에 엎어지고 굴드는 재빨리 다음 총알을 장진했다. 소년의 기세에 질린 다른 인디언이 부상자를 업고 결국 달아났다. 이 때부터 제이 굴드는 평범한 조그만 아이가 아니라고 마을사람 모두가 믿게 되고 부친도 기뻐했다.
당시는 학교가 지금처럼 무료가 아니고 수업료를 받는 시대였으므로 어린 나이에 취직, 학비를 벌었다. 처음에는 가죽 말리는 일을 하다 학교를 가면 너무 힘이들어 그만 두고 수학실력을 살려 측량 보조사 일을 하게 되었다.
그 당시 땅은 많으나 측량이 정확히 되질 않아법적 문제가 많이 야기되므로 땅 부자들은 측량이 필요했다. 측량회사 사장은 점심을 매일 사주겠다고 해놓고 밥값은 커녕 월급도 주질 않았다.
굴드는 너무 배가 고파 산속 길가에 쓰러져 지나던 농부에게 구출된 적이 여러번 있었다. 결국 굴드는 측량하기 전에 돈을 자기가 받아서 비용 제하고 남은 돈을 회사에 제출했다. 이후 친구 3명과 동업, 그들은 측량을 하고 굴드는 일감을 따오는 일을 맡았다. 인디언 사건 때문에 용감하고 착실한 소년으로 평판이 나 있어서 일감은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부자들의 습성, 생활 태도 등을 파악하게 되었고 그들과 가까운 관계를 맺었다.이 부자 손님들이 장차 굴드가 억만장자가 되는데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55세에 세상을 뜰 때 가족에게 유산을 77억달러나 남겼다.
측량사업으로 제법 좋은 수입을 올리고 있을 때 땅을 많이 가진 사업가 자독 푸렛(Zadock Pratt)을 알게 됐다. 가죽장사를 한 푸렛은 가죽을 건조하기 위해 많은 나무를 벌채했지만 조림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판이 나빠 아무도 푸렛과 사귀기를 꺼려했으나 굴드는 그에게 최상의 대우를 하면서 접근했다.
그러나 푸렛은 채벌한 지역을 개발해 은행도 세우고 잡화가게고 내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마을로 변모시켰다. 주민들도 자연히 푸렛을 칭찬했고 이를 바탕으로 푸렛은 후일 의원에 당선됐다. 이후 그 마을을 위하여 일하는 훌륭한 정치가가 되었다.
푸렛은 종업원 4만명을 거느리고 이 사업에 투자한 경영 불참 동업자가 300명이나 된다고 굴드에게 알려주었다.푸렛은 뉴욕의 쇼하리킬 마을에서 살았는데 그 마을의 발전에 공이 커 주민들은 동네 이름을 프렛빌(Prattville)로 고쳤다. 또한 마을 입구에 비석을 세워 그의 덕을 길이 기렸다. 이것을 본받고 닮은꼴이 되고픈 사람이 바로 제이 굴드였다.
굴드와 푸렛은 가죽장사를 동업했지만 굴드는 자기 혼자만의 가죽 건조회사를 차렸다. 푸렛과 똑같은 방식으로 마을을 개발하는 것은 물론 학교까지 세우고 교사들의 월급까지 해결해 주었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 이름을 굴드보로(Gouldboro)로 바꾸어 그에 대한 고마움을 후세에 전했다.
얼마후 푸렛 및 푸렛의 사위와 불화가 시작되자 회사를 넘겨주고 철도회사에 매달렸다. 주식회사의 법률을 습득하고 월스트릿에 출근하듯 다니면서 철도회사 주식에 투자하기 시작해 많은 재미를 보았다. 또한 철도회사를 컨트롤하면 미국 산업의 물류 수송이 자기 수중에 들어온다고 판단,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이리하여 유명한 에리 철도전쟁이라는 철도회사 주식 스캔들과 뇌물사건, 이로 인한 뉴욕주 의회의 당파싸움 등을 유발했다. 결국 에리 철도는 굴드가, 밴더빌트는 뉴욕, 시카고간 및 캐나다까지 철도를 받기로 하고 전쟁은 일단락 되었다.
이때 증권 플레이를 한 사람이 대니엘 드류(Daniel Drew)로 뉴욕 할렘 철도를 밴더빌트에게 팔 때도 사기를 쳤던 그 인물이었다. 드류는 재산을 신학교와 사회단체에 헌납하고 파산신청을 했다. 수많은 증권 조작 사기를 일삼던 그가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망해버렸다.
굴드는 저택을 지은 일이 없다. 그의 아들이 롱아일랜드의 포트 워싱턴 Sands Point Preserve에 Hempstead House(성곽)를 건축했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구식 건물로 지었다고 불평을 해 이사 오지도 않고 동(銅) 광산업자인 해리 구겐하임에게 팔았다.
구겐하임도 그 근처에 한 채를 더 짓고 파리제(Falise)라 이름 붙인 뒤 그곳에서 살았다.파리제는 입장료 2달러, 실내 구경이 5달러다. 건물 뒤로 가면 개인용 바닷가에서 즐길 수 있으나 수영은 금지다. 불을 피는 것도 금지된다. 여기는 롱아일랜드 East Exit 36N(Shearington/Port Washington)에서 정확하게 6마일 가면 오른쪽에 입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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