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소리 없는 소리’를 찾아서 (16)
▶ 백춘기 <골동품 전문가>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당시 “내가 필요한 것은 오직 금이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그는 황금을 약탈하기 위해 잉카, 마야, 그리고 인디언의 문화유산을 철저하게 뒤쥐고 돌아갔다. 마치 인간 두더지처럼.
나는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갈 때마다 잉카, 마야, 인디언 문명이 절규하는 소리 없는 소리를 듣는다.
■ 통곡하는 덕수궁 돌담
5.16 쿠데타의 주역들은 자신들이 군인이라 해서 결코 무식하지도 않고 지적이요 문화예술에도 조예가 깊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어했다. 이같은 과시욕이 빚은 일련의 사건들이 군사정권 초기에 일어났다. 그 첫 사업이 광화문 돌담을 허물고 갈아치우는 문화사업이었다.
1962년 초 새 시대에 걸맞게 수도 서울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조선왕조 500년을 상징하는 덕수궁 돌담이 헐리기 시작했다. 우중충하고 촌스럽고 답답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500년 문화유산인 돌담의 흙과 돌은 쓰레기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고 세련되고 예술성이 넘쳐 흐르는 초현대식 모자이크형 철제 담장이 들어섰다.
노랑색 파랑색 빨간색을 드문드문 배열시킨 바둑판 같은 철제 담을 완성시켜 놓고 서울시장이 나와 준공식까지 거행하였다. 덕수궁 속살이 백리 밖에서도 훤히 들여다 보이고 철제 담장 바로 안쪽에 스케이트장을 만들어 겨울에 스케이트를 타는 모습이 밖에서도 보였다.
서양 달력에 잘 나오는 어떤 풍경! 프랑스 파리 어느 궁전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광경에서 얻어낸 얄팍한 힌트의 결과물이었으리라. 미국대사관 쪽 돌담은 미국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쳐 헐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이유는 귀중한 문화유산일 뿐더러 돌담이 더 아름답다는 것이었다. 그 때 한 무명의 서울 시민이 사상계에 실은 글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속살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나이롱 치마를 입고 어쩔줄 몰라 하는 황후의 모습을 서울 시민이 보고 즐기란 말인가...”
2년만에 덕수궁 돌담은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돌담은 이미 조선왕조 500년의 문화유산이 아니다. 이와 유사한 시행 착오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 쫓겨간 독립문
내가 미국오기 얼마 전의 일이다. 독립문 상투 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가는 성산대로 고가다리가 준공되었다. 빗발치는 비판의 소리가 쏟아져 나오자 서울시가 하는 말이 참으로 걸작이다. “독립문을 헐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명당자리에 더 아름답게 옮겨 세울 계획이 서 있다” 독립문은 쫓겨 떠나가고 조국의 근대사를 증언할 천금같은 문화유산이 또 하나 사라져 갔다. 역사의 현장을 떠난 문화유산은 이미 유산이 아니다.
문화유산은 꼭 그 곳에 있어야 한다. 1960년대 말의 일이다. 경주 왕릉묘의 돌담을 허물어서 옮겨와 자기 집 담장을 쌓고 정원석으로 썼다가 들통이 나 쫓겨난 사건이 있었다. 바로 당시 경주 시장이 그 당사자이다. 한심하다 못해 서글픈 일이다.
■ 복원기간 13년
로마는 인류 문화유산의 보고라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문화유산이란 각 민족 각 지역마다 나름대로 개성과 유래를 달리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민족의 유산이 더 훌륭하고 아름답다는 비교평가란 있을 수 없다. 로마가 문화유산의 보고라 하는 것은 한 곳에 집중적이고 집약적으로 형성된 문화유산 단지가 로마만한 곳이 없다는 뜻이다.
또한 문화유산은 생물과도 같이 인간의 손에 의해 꾸준히 돌보지 않을 때 사라져 버린다. 이런 점에서도 로마는 손색이 없는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1981년 로마에서는 세기적인 고미술 복원공사가 시작되었다. 바로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거작 ‘최후의 심판’의 복원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천정화 ‘최후의 심판’은 1508년에 착수하여 1512년에 완성시킨 세기의 걸작품이다. 복원 스폰서로 나선 일본 NHK방송은 20억엔(1981년 일본화폐)을 투자, 1994년에 완성시켰다. 실로 450년만에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당시의 색채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작업은 원색의 손상을 우려한 나머지 일체의 화학성분과 강성물질(속칭 빼바 등)은 적극 피하고 식물성 세제와 연성 스폰지만으로 450년 묵은 때를 벗겨냈다. 그 정성과 노력은 속물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탈리아 상품 브랜드 가운데 세계 여성들을 미치게 만든 ‘구찌’가 있다.
이탈리아가 이 ‘구찌’로 벌어들이는 일년의 수익 보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을 보기 위해 로마를 찾는 관광수입이 많다는 통계 숫자를 보고 놀랄 필요는 없다.‘구찌’의 생명은 이미 한 발을 묘지에 들이민지 오래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수명은 지구의 종말과 같이 한다. 인류의 문화유산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 본능적인 애착
종이 위에 눈하며 코하며 입하며 천상 도깨비 같은 할아버지 얼굴을 그려놓고 스스로 대견해 죽겠다는 손자는 이 방, 저 방 자랑하고 돌아간다. 바로 ‘본능적인 애착’인 것이다.
남의 부러진 다리는 잘도 맞추고 돌아가는 의사도 집에 돌아와서는 옷걸이 못 하나 제대로 박지 못하는 ‘쑥’들이 많다.(여기서 말하는 ‘쑥’은 먹는 쑥이 아니다). 그런 서방님이 어쩌다가 달랑거리는 선반에 못질하여 어설프게 나마 고정시켜 놓았을 때 마누라는 그것이 그렇게 대견스럽다. 손님이 올 때마다 서방님이 고친 선반을 자랑한다.
멋지고 단단한 플라스틱 선반을 제쳐놓고 서방님의 선반 솜씨를 자랑하고 싶은 그 ‘본능적 애착심’이 바로 인류문화유산에 대한 인간의 애착심이다. 하물며 조상의 얼과 손때 흔적이 연연한 인류의 문화유산을 어찌 소홀히 다룰 수 있겠는가!
앙드레 말로가 드골 정부의 문화장관으로 있을 때 백년이 넘는 먼지와 때로 보기 흉할 정도로 검게 그슬려 있는 개선문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개선문은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이다.
프랑스 국민 뿐 아니라 전세계 고미술 애호가 역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복원작업을 지켜보았다. 복원작업은 화학 세제는 철저하게 배제된 채 순 물과 브러시만으로 이루어졌다.
마치 거대한 다이아몬드를 닦아내듯이 돌 표면 손상을 적극 피했던 것이다.
일찌기 한국 문공부 고적 보존위원회 양윤모 위원은 고인돌을 거대한 보석(저서 살아온 그대로)이라 표현한 바 있다. 멋진 구사력이다. 거석 고인돌이야 말로 대지라는 어머니가 끼고 있는 보석반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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