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를 떠나 해외에서 살고 있는 한민족은 사는 나라에 따라 각각 특이한 명칭을 가지고 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재미한인이라고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스스로 고려인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조선족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개방 이후 이 조선족이 미국으로 유입되어 미국 속에 또 하나의 한인사회인 조선족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
조선족의 미국 입국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는 유학생 등 소수의 사람들이 미국에 왔으나 약 7년 전부터 돈벌이를 목적으로 본격적인 미국 행렬이 이어졌다.
뉴욕의 조선족은 약 5천명으로 추산되는데 대부분 플러싱 지역에 살고 있다. 플러싱은 중국계와 한국계가 섞여 살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혈통적으로는 한국계이지만 국적은 중국인이며 생활방식과 음식 등 중국문화에 익숙해 있다. 그래서 이들은 한인사회에서 일을 하면서도 중국사회에서 일상생활을 하는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마치 미국사회에서 일하는 한인들의 일상생활이 한인사회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조선족이 진출하고 있는 직업 분야는 남녀를 불문하고 네일업소가 가장 많다. 주로 한인 네일업소의 종업원으로 일을 하는데 경험을 쌓고 돈을 모아서 업소 주인이 된 사람들도 있다. 그 다음 순위가 한국식당이다. 뉴욕의 한국식당에서 주방일을 하다가 경험이 늘면 지방 중소도시의 한국식당에서 주방장이 되기도 한다. 그밖에 여러가지 직업에 종사하지만 조선족은 대부분 영어가 부족해 취업 범위가 그리 넓지는 않다.
이 조선족 동포들이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고난의 역정이라고 할 수 있다. 7년 전 뉴욕에 정착한 뉴욕조선족동포협회 최동춘 회장(44)의 케이스도 예외는 아니다.
최씨는 북경 인근 진황도시의 출신이다. 고향에서 전자제품 도매상을 경영하면서 바깥세상에 일찍 눈을 뜬 그는 큰이모의 묘를 성묘하러 한국을 다녀온 후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 갈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왕 외국에 나갈 바에야 미국으로 가자고 마음을 바꾸었다. 브로커를 통해 B-1비자를 받아 미국에 와서 이곳 저곳을 두루 다니다가 뉴욕에 정착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조선족은 B-1 비자로 입국한다고 한다.
그는 미국에 왔으나 너무나 생소한 환경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같은 한국말을 쓰는 한인들과 의사소통 조차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델리나 그로서리가 무슨 말인지, 심지어는 커피샵이 무슨 말인지 조차 몰랐다니 형편을 짐작할만 하다.
온갖 일을 다 하면서 1년 뒤 최씨를 뒤따라온 부인과 합류했다. 고생끝에 영주궈도 얻었고 이제는 어엿한 건축회사를 차려 개인 가옥을 주로 수리해 주는 일을 하고 있다.그는 초창기에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한 끝에 새로 오는 조선족의 정착을 돕기 위해 2000년 2월 뉴욕조선족 동포협회를 만들었다.
미국에 온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루 하루 먹고 사는 일이기에 협회가 도와주는 일은 직업을 구해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선족의 수도 어느 정도 늘어나 연고자들이 서로 연락하여 공항 마중, 아파트 리스, 구직문제 등을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협회의 일도 바뀌었다. 주로 체불 임금을 받아주는 등 권익보호와 무연고자가 병이 나면 입원을 도와주고 사망할 경우 장례 및 유해 송환 등을 처리해 주고 있다.
최회장에 따르면 조선족들은 대부분 가족을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이 많아 집값을 줄이려고 여럿이 룸메이트로 살고 있는 실정이란다. 그러다가 형편이 좀 나아지면 방 한 칸을 쓰게 되고 더 나아지면 아파트를 얻어 살게 되는데 부부가 함께 살게 된 사람들은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며 자녀들까지 데려와서 살게 되면 미국생활이 완전히 자리 잡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에는 이렇게 고생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 옛말 하며 사는 것은 조선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에 일찍 온 조선족 중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들도 있다.
집을 두 채나 가진 사람, 네일가게를 두 개나 가진 사람, 롱아일랜드의 큰 저택에 사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뉴욕지역에 한약을 도매하는 필라델피아의 정용철씨도 성공한 케이스에 꼽힌다고 한다.
한인 직장에서 일하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문제 없이 잘 지내고 있지만 가끔 업주나 고객과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인 건축업자가 조선족 종업원에게 일을 시키고 3개월치나 임금을 주지 않았던 일도 있었고, 사우나와 식당에서 한인 주인이 조선족 종업원을 구타한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조선족들이 겪는 가장 큰 애로는 신분 문제인데 비자기간이 만료되었으나 영주권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서 체류 신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약점을 악용, 걸핏하면 이민국에 신고하겠다고 협박을 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최회장은 한인과 조선족 사이에 이런 분규가 생길 때는 아찔한 생각이 든다고 한다. 많은 조선족들이 한인사회에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바람직한 일인데 만약 이런 분규가 확대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분쟁에 말려들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조선족은 혈통으로는 한인이고 국적으로는 중국인이고 또 거주지는 미국이
라는 삼각지를 맴돌고 있는 특수 입장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한인이 포용하면 한인이 될 수 있고 중국인이 포용하면 중국인도 될 수 있고, 시민권을 받으면 한인도 중국인도 아닌 미국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만약 한인과 조선족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조선족의 뒤에 있는 중국계 단체와 중국영사관이 개입하여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
사실 최회장이 회장으로 있는 뉴욕조선족동포협회의 영어 명칭은 The Korean Chinese Association of New York으로 자신들을 한국계 중국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이 단체는 중국본토계인 뉴욕 중국인연합회의 산하 단체로 가입되어 있고 최회장은 중국인연합회의 수석부회장을 맡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인과 조선족 뿐만 아니라 한인과 중국계의 교량 역할을 하기 위해 오는 추석잔치에 중국단체의 참석을 주선하고 있다.
그는 소수이긴 하지만 한인들이 조선족의 처지를 악용하지 말기를 바랬다. “조선족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처럼 약합니다. 이런 어린아이를 발로 차고 때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임금을 안 주거나 이민국에 신고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아 주십시요” 이를 위해 한인단체들도 관심을 가져 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는 자신이 조선족동포협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은 한인들과 조선족 사이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다.
최회장에 따르면 대부분의 조선족들은 돈을 번 후 고향에 돌아가겠다고 생각하고 이역만리 미국에 오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귀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돈을 모으면 배우자와 자녀를 데려와 미국에 사는 것이 꿈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한인이나 조선족이나 그리고 다른 어느 나라의 사람이나 똑같은 아메리칸 드림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기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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