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 부호들의 대저택
▶ <윤병희>
리빙스톤 가문은 특히 뉴욕에서 시작한 미국의 명문이다. 리빙스톤은 이름이 보여주듯이 영국의 스코틀랜드인이다.
165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로버트 리빙스톤은 장로교 목사인 아버지 존 리빙스톤이 영국의 왕 찰스 2세와 대주교인 비숍에게 충성 맹세를 거절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해서 살다가 1672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젊음의 원대한 꿈을 안고 신대륙 이민 배를 타고 미국에 와서 뉴욕주에서 네덜란드 사람이 제일 많은 업스테이트로 둥지를 잡고, 네덜란드 말을 유창하게 잘 하는 그는 1년 후에 뉴욕주의 영주(領主)격인 밴 렌스래어의 눈에 들어 그의 비서겸 보좌관을 하다가 인디안 커미셔너까지 겸임하는 렌스래어가 인디안의 일을 그에게 맡기니 어린 나이지만 일약 유명하게 되었고 그의 수완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게 되었다.
인디안과의 모피와 가죽 교역 등이 활발하게 되어 사업지식이 요구되니, 로버트 리빙스톤의 수완이 빛을 받게 되었을 즈음인 2678년 밴 렌스래어가 죽은 후 8개월만에 그 미망인(렌스래어의 부인)과 결혼을 하니 그는 이제 이곳의 젊은 새 영주(Lord)가 되어 前의 밴 렌스래어의 모든 땅을 다 찾아 관리를 시작하였다.
모두 16만 에이커(160,000 에이커, 현재의 콜롬비아카운티 지역)에 달했다. 이로써 리빙스톤 가문이 시작되고 정치, 경제, 문화나 예술적으로도 앞서 가는 신대륙의 새로운 귀족 가문으로 시작되었다.
리빙스톤 가문의 첫 주인이 1728년에 사망한 후, 리빙스톤 저택을 첫째 아들 필립(Philip), 그리고 다음 아들 로버트에게 아래쪽의 저택을 상속했는데 그곳에 1750년에 신형의 이층집을 지었다.
이 리빙스톤 가문이 7代가 이 집에서 살았는데 조부의 이름 로버트 리빙스톤을 계속 사용하여 그 혼돈이 심하여 각 사람 이름과 생사년을 비교하는 차트를 만들어가며 정리하였다.
첫번째가 네덜란드에서 이민온 1세인 로버트 리빙스톤(1654~1728) 그 아들 로버트 리빙스톤(1688~1775) 그의 손자 로버트 리빙스톤(1718~1775) 뉴욕의 콜롬비아대학 법대를 나온 증손자 로버트 리빙스톤(1746~1813)이다.
로버트 리빙스톤은 영국의 보호를 받는 영주로서 독립전쟁이 발발하자 독립군 편에 서서 영국을 공격하니 당시 맨하탄에 주둔중인 존 보건(John Vaughan) 장군이 허드슨강을 타고 킹스톤까지 올라와 보니 사라토가 전투에서 영국의 버조인 장군의 군대가 독립군에 대파되고 항복하게 되니 보건장군은 그 보복으로 킹스톤시를 불바다로 만들고 내려오다가 리빙스톤의
클러몬트 저택이 강에서 가까이 있는지라 불방망이를 던져서 저택을 완전히 태우고 맨하탄으로 돌아갔다.
당시의 리빙스톤 증손자의 어머니(Margrett Beekman Livingstone)는 4남 6녀를 둔 엄마로서 용감무쌍하고 강인하여 곧바로 그곳의 소작인들과 노예들을 동원하여 저택을 재건하였다. 이 때에 뉴욕주 지사인 윌리암 크린톤은 이곳에서 부역하는 자의 병역을 면제해 주었다.
이 어머니는 정말로 서부 개척시대의 강인하고 억척스런 어머니였는데 친정도 빅만장군의 가문으로 결혼할 때 지참금으로 엄청나게 많은 땅(덧취스 카운티)을 가지고 시집을 와서 10명의 자녀를 두고 이 증손자가 이 저택을 새로 지은 사람이고 독립선언문을 기초했고,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식을 주관했고 뉴욕 주지사와 불란서 대사, 루이지애나주를 불란서로부터 구입하는 거래를 성사시키는데 역할이 컸다.
또 불란서에서 대사로 있을 때에 미국인 로버트 풀톤이라는 미술가가 증기기관으로 배를 만들어 증기선을 만드는 일을 재정적으로 후원해 주어 성공시켜 맨하탄에서 알바니까지 허드슨강으로 왕래하는 처녀 출항을 성공시켰다.
워싱턴대통령이 리빙스톤을 정부내각에 기용하지 않아서 토마스 제퍼슨을 도와 공화당을 만들어서 대통령에 당선시키고, 이래서 지금도 이곳 업스테이트는 공화당 강력 지지기반으로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불란서 대사와 초대 외무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하며 리빙스톤 가문을 가장 빛내는 리빙스톤 손자가 되었다.
이민 1세로부터 7세에 이르러 손자 존 헨리 리빙스톤(John Henry Livingston)은 앨리스 델라 필드와 결혼했는데 앨리스는 조각미술 공부를 한 예술가여서 나중에 이 저택을 상속받아서 많은 실내장식을 새로 하였다.
그는 두 딸이 있었는데 호노리아(Honotia)와 재넷 두 자매는 주로 유럽에 가서 한 계절씩을 지내므로 불어와 독일어에 능숙했는데 이들이 노인이 되어서는 호노리아가 주로 이 집에서 살았다.
세계 제2차세계대전 때에는 겨울에는 난방관계로 주로 하인들이 살던 작은 집으로 옮겨 살고 여름에만 저택으로 옮겨 살다가 2000년에 호노리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모두가 역사보존협회에 귀속되어 있다. 이 저택에는 널찍한 도서관에 수많은 책과 유럽 각국에서 수집한 진귀품도 전시되어 있다.
금으로 장식된 시계, 벽에 걸려있는 알렉산더 그램벨이 처음 만든 옛날의 전화, 교환번호는 3번이란다.또 드넓은 식당에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듯한 앤드류 잭슨 장군의 큰 초상화가 걸려있어 평소에 잭슨장군과 친분이 두터웠음을 짐작케 한다.
재넷 리빙스톤 몽고메리(Janet Livingston Montogomery)는 6명의 로버트 리빙스톤의 딸 중 두 딸이 장군과 결혼하였다. 언니인 거투르드 리빙스톤(Gertrude Livingston)은 모간 루이스장군의 부인이 되었고, 동생 재넷이 39세의 리차드 몽고메리 장군과 결혼했는데 독립전쟁시에 몬트리얼에 주둔하는 영국군과의 전투에서 전투시작 5분만에 적의 총에 맞아 전사했다.그 후 재넷은 허드슨 강변에 몽고메리 플레이스(Montgomery Place)라는 저택을 지었다.
허드슨 강변에 많은 저택 중에 다수가 리빙스톤 가족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다.클러몬트 저택 밑으로 바로 강변에는 지금도 사용하는 철로가 있고 기차가 맨하탄과 킹스톤을 왕래한다.
■ 가는 길
4월부터 10월까지, 화요일부터 일요일 아침 10시부터 5시까지 개장.
입장료 성인 5달러, 노인 4달러.
결혼사진을 찍으려면 518-537-4240으로 전화예약해야 한다.
주소: Clermont, 1 Clermont Ave., Germantown, N.Y. 12526
1-87 Thruway North 출구 21번 Rt. 23 동쪽으로 Rip Van Winkle Bridge E.로 다리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9-G 남쪽으로 약 9마일 정도 가다가 오른쪽에 있다.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