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 부호들의 대저택
▶ <윤병희>
허드슨강변에서 융성한 명문가 리빙스톤 가문은 제3대(로버트 리빙스톤)에 가서 또 하나의 대지주인 빅그만 가문과 혼사로 합쳐 엄청난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현재의 콜롬비아 카운티는 리빙스톤의 소유였고, 덧취스 카운티는 부인 마가렛 빅그만(Margarett Beekman Livningston)의 소유였다. 빅그만은 결혼 지참금으로 큰 토지를 가지고 리빙스톤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리빙스톤은 현재의 카운티 2개를 다 소유한 땅부자가 되었다.
마가렛 빅그만 부인은 서부개척시대에 걸맞는 여장부였다. 개척자 정신으로 무장한 강인하고 억센 의지를 가졌다. 이 부인은 아들 4명과 딸 6명을 낳아 모두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특히 아들 로버트는 가문을 빛낸 훌륭한 아들이었으며 첫 딸 제넷 엘 리빙스톤은 처음으로 장군과 결혼, 가문의 영예를 높였다. 그러나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도 따르는 법. 온 집안이 기쁨에 들떠 있을 때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재넷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2년 반이 채 못 되어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북미주에서 계속 패전만 하던 영국군이 캐나다로 후퇴, 퀘백지역에까지 몰렸다. 미국은 마무리 공격을 하기 위해, 재넷의 남편인 리차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대위를 준장으로 승진시켜 선발대를 맡겼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전방에서 공격을 시작한지 5분도 못돼 머리에 총탄을 맞고 그 자리에서 숨졌다. 몽고메리는 전쟁 시작 후 처음으로 전사하는 장군이 되었다.깨가 쏟아지는 결혼생활이 허무하게 끝나자 재넷은 어떻게 살아야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게 됐다.
리빙스톤의 첫번째 할아버지는 영국에서 종교(장로교) 때문에 네덜란드로 망명까지 하면서 살다 끝내 귀국을 못하고 망향의 한을 안고 눈을 감았다. 그의 아들(로버트 리빙스톤 1656~1727)은 후세들에게 종교적인 아무런 가르침이나 영향을 주지 못했다. 오로지 돈과 명예만을 남기고 갔다는 생각이 든다.
재넷은 본래가 자기 의견이 분명하고, 성격이 모친처럼 강했다. 본인은 물론이고 주위의 누구도 재혼을 권하지 못했다. 남편 리차드 몽고메리 장군은 원래가 영국의 아이리쉬 혈통의 청년으로 본국에 형님의 아들이 있었다.
재넷은 남편의 조카인 윌리암 존스를 양자처럼 여기며 묘목사업을 하면서 살았다. 59세 때 이 집을 건축하기 위해 당시 유명 건축가 알렉산더 제이 데이비스에게 의뢰했다. 처음에는 사각형 박스처럼 지어서 살다 다시 데이비스를 불러서 양쪽 날개를 증축하였다.
북쪽은 테라스 형태의 탁 트인 공간으로, 남쪽은 유리창이 있는 방을 늘려서 증축하였다. 집 앞 정문도 백악관의 정문을 흉내 내었다고 볼 수 있다.
허드슨강이 가까이 있어 뒷마당에서 허드슨의 경치와 멀리 보이는 캐츠킬의 산맥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로버트 리빙스톤(1718~1775)의 부인 마가렛 빅그만 리빙스톤(1724~1800)의 부인인 마가렛 빅그만 리빙스톤(1724~1800)은 10명의 아들 딸 중 제일 어린 막내둥이인 에드워드 리빙스톤(1764~1836)은 루이지애나주에 살았다.
뉴저지의 프린스턴에서 공부하고 자기 형처럼 법률공부를 하고 정치를 하였다. 토마스 제퍼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뉴욕주 법무장관에 올랐다. 그러나 부인 메리 맥에버스(Mary McEvers)가 별안간 몸에 빨간 열꽃이 나면서 앓다가 곧 사망하는 불행을 당했다.
에드워드는 자기 보다 18세나 어린 하이티에서 피난온 젊은여자, 루이스 다베작 드 카스테라 모로우 드 라씨(불란서인으로 부친이 하이티에서 농장주)와 결혼했다. 연령차가 너무 많이 나는 결혼을 두고 뉴욕 상류사회가 쑥덕거렸으나 이를 무시하고 결혼, 딸 줄리아와 코알리를 두었다. 코알리가 이 저택을 상속 받았다.
그러니까 재넷이 막내동생 에드워드에게 상속하고, 그는 딸 코알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동생 줄리아에게, 다시 줄리아의 손녀인 비올레따에게, 줄리아는 조셉 델라필드와 결혼하였다.
1822년 에드워드는 루이지애나주 의회 의원에 당선되고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누나인 재넷을 자주 방문했다.
1828년 루이지애나 주상원의원으로 임명돼 1833년부터 2년간 프랑스 대사로 재직했고, 1836년 이곳에 와서 5월23일에 별안간 사망했다.이 저택이 부인 루이스와 딸 코알리에게 상속되었다.
건축가 데이비스가 직접 증축한 후 이 저택은 이탈리아 로마 근처 티볼리에 있는 베스타 사원과 비슷하게 되었다고들 한다. 앤드류 잭슨 다우닝(건축가)은 정원을 디자인했다고 한다.
유리로 지은 그린하우스 옆 꽃밭의끝쪽에 고양이와 개를 위한 묘와 비석이 있어 이 집 주인들의 애완동물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볼 수 있다.
이곳 주인들의 여러 이야기 중 비올레따는 특히 무엇이든 열성을 다하는 안주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일본식 꽃꽂이(Ikibana)에 상당한 식견과 솜씨를 발휘, 여러번 전국대회에서 상도 받은 바 있고, 가장 최근까지 생존했던 안주인이다(1875~1949).
■ 가는 길
I-87 New York Thruway North Exit 19로 나와서 Rt. 28W.(Rt. 209W)로 들어간다. R. 199 North로 Rheincliff Bridge를 건너서 East로 가다가 9-G(North)로 들어간다.
Annandale Rd에서 왼쪽으로 가면 오른쪽에 입구가 있다. 역사 유적 신호판을 보면서 가면 틀림 없다.주소: River Road(P.O.Box 32) Annandale-on-Hudson, N.Y. 12504
전화: 914-758-5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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