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인상권 40년 뜀박질 "여기서 멈출 수 없다"
내년으로 100주년을 맞는 한인 이민역사만큼 길지는 않지만 뉴욕의 한인상권도 40년을 눈앞에 두고 있을 정도로 뿌리가 깊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경제개발의 움직임이 태동될 무렵인 60년대 초부터 맨하탄 거리에는 하나 둘씩 한인 상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초창기 역사는 기록으로 남은 게 없어서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 사람들이 어떤 비즈니스를 시작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잡화 등을 파는 행상을 비롯해 보따리 장수라 불리는 소규모 무역업이 개별적으로 이뤄졌다는 게 중론이다. 미주한인 이민 100주년을 앞둔 시점에서 뉴욕한인 경제가 걸어 온 길을 되돌아본다.<편집자 주>
■1960년대∼1970년대 초
본격적으로 한인상권이 형성된 시기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이다.
당시 맨하탄 브로드웨이 상가는 유태계와 인도계 도매상들이 활동하며 일정규모의 상권을 형성한 도매상가가 존재했지만 사실상 ‘죽어 가는 지역’이었다. 이 때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미국에 진출한 한국 기업과 자생적으로 비즈니스를 하던 한인들이 사무실과 임대료가 싼 브로드웨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초기 한인업체들은 대부분 가발과 관련된 업종으로 사무실 내에서 주로 영업하는 형태였다. 가발은 당시 수입업자, 도매상, 소매상의 유통과정을 거치는 동안 상당한 마진을 얻을 수 있었고 한국내 생산업체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자본력이 부족했던 한인들에게 좋은 아이템으로 꼽혔다.
■1970년 중반 이후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가발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한인들은 업종을 다변화하게 된다. 가발 외에도 모자, 주얼리, 신발을 취급하는 도매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에는 40여 개의 한인 도매상이 들어서 한인 상권이 제대로 골격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이 때를 기점으로 한인상권은 급속한 팽창을 거듭했다. 79년 경제인협회 전신인 브로드웨이 한인상인번영회가 결성됐고 퀸즈 플러싱 지역은 한인 밀집 주거지역으로 형성된 것.
70년대 초반까지 독일계를 비롯해 그리스, 아이리시 등 백인계가 주로 거주하던 플러싱 지역이 7번 전철이 연결돼 교통이 편리하고 안전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초기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상사, 공관 주재원들이 살기 시작했다가 점차 맨하탄은 물론 브롱스, 브루클린에서 비즈니스를 하던 한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한인타운으로 일변했다.
■1980년대
80년대는 뉴욕 한인 경제사의 황금 시대였다. 한인 이민자들의 진출이 가속화하면서 브로드웨이에는 한때 한인상가가 200개를 넘어섰고 32가를 중심으로 식당을 비롯해 등 소비업소들이 들어서 최대 호황을 누렸다.
플러싱 역시 80년대 초반 한인 인구가 1만 명을 넘어서면서 메인 스트릿과 루즈벨트 애비뉴를 중심으로 상권이 급속히 퍼져갔다. 김광식 플러싱 디벨럽먼트 소장은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한글 간판이 생겨날 정도의 빠른 속도로 상권이 형성됐다"고 말했다.
특히 플러싱은 주거지역이었던 만큼 맨하탄과는 달리 식당, 슈퍼마켓, 선물가게, 서점, 보험, 의류점, 여행사 등 의식주와 관련된 업종들이 주류를 이뤘다. 대표적인 한인 상가인 유니언 상가의 경우 전체 130여 업소 중 95% 이상이 한인 관련 비즈니스였을 정도다. 이 같은 한인 상권의 확장은 맨하탄과 퀸즈 뿐만 아니라 브루클린, 브롱스로도 범위를 넓혀갔다.
업종 또한 다양화돼 청과상을 비롯해 델리 그로서리, 피쉬마켓, 세탁소, 네일, 주류판
매점, 뷰티서플라이, 잡화점 등 다양한 비즈니스 형태로 뉴욕 경제의 한 축을 이룬 것.
브루클린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플랫부시, 브라이튼 비치, 벤슨허스트·베이릿지, 풀턴 스트릿 등 4개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 상권이 형성됐고 브롱스는 포담을 비롯해 벨몬트, 베드포드 지역에서 한인 비즈니스가 뿌리를 내렸다.
■1990년대
그러나 9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미국 경제가 불황에 빠지자 한인 상권도 연쇄적으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때부터 한국에서 유입되는 한인이 이민자가 아닌 유학생, 지상사원 등으로 변화되면서 상권 역시 새로운 변신이 요구된 시기이기도 하다.
브로드웨이 도매상가는 점차 경제력이 위축돼 하나둘씩 한인 업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고 32가 한인타운은 도매상 관련 업소에서 한인 유학생과 관광객을 상대로 한 품목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등 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발전을 거듭하던 플러싱 한인 상권도 위기를 맞았다. 한인 업체끼리 과당 경쟁을 벌이면서 렌트 폭등을 불러왔고 중국인 유입이 크게 늘면서
점차 메인 스트릿 상권을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제 2000년대를 맞아 한인 상권은 보다 많은 변화가 요구되고 있다. 90년대 미국경제 불황과 한국의 IMF 사태를 겪으면서 체질 개선을 해왔지만 지난해 9.11테러와 함께 경기 침체가 지속되면서 더 많은 인내와 노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이미 맨하탄 한인상권은 특성을 살려 주류사회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을 강화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특성에 맞는 아이템 개발과 전문화가 시급하다는 지적들이다.
뉴욕한인경제인협회 신상호 전회장은 "많은 업체들이 브로드웨이를 떠나고 있지만 장소를 옮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며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아 경쟁력을 키우는 것만이 한인 상권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플러싱 지역도 마찬가지. 이미 메인 스트릿을 중국계에 내주고 인도계 등의 협공으로 유니언 스트릿의 한인상권마저 위협에 직면했는데 다양한 민족이 주거하는 환경을 이용한 마케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요구가 많다.
김광식 플러싱디벨럽먼트 소장은 "과당 경쟁과 한인 고객 중심의 영업형태에서 벗어나 다양한 민족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이 시급한데다 긴 안목으로 장기적인 투자가 절실히 요구된다"며 "한인끼리의 반목과 질시에서 벗어나 여럿이 힘을 합해 대규모 투자는 물론 공동구매, 공동판매 등 다양한 형태의 비즈니스를 시도해 한인상권을 안정화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래준·김노열 기자>
■’씨씨 백화점’ 창업 임정원씨
9.11테러 불똥 극복해야죠
"70년 맨하탄 32가에 씨씨백화점을 시작할 때만해도 무서울 정도로 음험한 곳이었어요. 렌트비가 싸서 이곳을 택했는데 이만한 한인 상권이 형성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요."
씨씨백화점을 창업한 임정원(미국명 주디스 정·73)씨는 "현재 스탠포드 호텔 로비 자리에 담배 가게를 열었는데 캔디 등 잡동사니들 위주로 물건을 팔다가 점차 사업을 확장해 7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왔어요"라며 "70년대 중반부터 약 10년간은 씨씨백화점 전성기로 가게 앞에서는 하루 종일 물건을 내리는 트럭이 끊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고 말했다.
임정원씨는 98년 며느리인 정영주(46)씨에게 사업을 넘겨준 뒤 자신은 고희를 앞둔 69세의 나이에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해 씨씨부동산을 차렸고 브로커 자격증까지 따서 시들지 않는 사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정영주 사장은 "외국인 회사에서 5,000명의 직원을 관리하는 매니저로 있던 시어머니가 월급쟁이로는 마음에 차지 않아 회사를 다니면서 씨씨백화점을 차렸다"며 "한창때는 손님 한사람이 7,000~8,000달러 어치 물건을 한꺼번에 사는가 하면 서울서 온 보따리 장사들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고 말했다.
정작 정사장 자신도 씨씨백화점 고객이었다가 매장에서 어머니 일을 도와주던 남편(데이빗 정·43·무역업)을 만나 결국 가게 주인이 됐다. 정사장은 "제가 처음 씨씨백화점을 찾았던 때가 87년이었는데 당시 물건은 메이시백화점 등에서 구경할 수도 없는 고급이었고 다른 미국 점포보다 가격이 싸서 자주 찾았다"며 "카세트 테이프 리코더, 카메라, 계산기, 다리미 등 전자제품부터 유명 브랜드 의류, 칼, 건강식품 등의 생활용품, 벨트 및 지갑 등 잡화까지 없는 게 없었다"고 회고했다.
올해로 현재의 자리에서 비즈니스를 시작한지 만 30년을 맞이하는 씨씨백화점이지만 환경은 많이 달라졌다. 한때 20여명의 직원에 3층 건물 전체를 사용했지만 한국이 IMF를 겪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1개 층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됐다. 정영주 사장은 "지난해 테러까지 겪으면서 많은 고객들이 다른 주로 떠났고 비자 발급이 어려워지면서 한국인 입국자가 크게 줄어 어려움이 많다"며 "주력 품목을 화장품과 골프의류로 바꾸고 매장을 대폭 개선해 고객 유치에 힘쓰고 있는데 시어머니가 이룬 사업을 꼭 지켜내겠다"고 말했다. <장래준 기자>
■뉴욕곰탕 김유봉 사장
한인타운, 땀과 눈물의 결정체
82년 맨하탄 32가에 뉴욕곰탕하우스를 오픈한 김유봉(55)사장은 "뉴욕지하철은 물론 뉴저지에서 오는 패스트레인과 연결되는 등 교통이 편리해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76년 미국에 온 김사장은 44가의 호심식당에 취직해 식당일을 시작했다. 접시닦이에서 화장실 청소까지 온갖 잡일을 하다가 6개월 뒤 주방 일을 맡았고 3년 뒤인 79년 27가에 곰탕집을 열면서 마침내 자립에 성공한다.
"식당이라고는 했지만 테이블 3개에 의자가 6개밖에 없는 형편없는 장소였어요. 종업원 이래봐야 나하고 아내가 전부였고 메뉴판도 없이 곰탕, 된장찌개, 김치찌개, 해장국 4가지 음식을 팔았습니다. 한 그릇에 3.95달러를 받았는데 잘 팔면 100달러, 아니면 40달러에 못미치는 하루 매출이었어요. 정말 경험도 없이 멋모르게 시작했던 사업이었어요"라고 회고했다.
결국 가게를 옮기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배달을 다니면서 이곳저곳을 물색하던 김사장은 32가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당시 32가에는 씨씨백화점과 서울하우스 식당이 유일한 한인업소였어요. 하긴 맨하탄 전체를 둘러봐도 한인 업소는 호심, 아리랑, 명동장, 삼복식당 등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전체 한인수도 4,000명 정도였으니까요"라고 한다.
이곳에서 김사장은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한그릇에 4.95달러를 받던 곰탕이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고 하루 2,000~3,000달러의 매출을 올리면서 맨하탄의 대표적인 한인 음식점으로 성장한 것. 이제 뉴욕곰탕하우스는 3층 규모에 총 300여석을 갖추고 32명의 종업원이 일하고 있다.
지난해 7월에는 뉴저지 버겐 블러바드에 총 300여석이 갖춰진 2층 규모의 지점을 내기도 했다. 김유봉 사장은 "32가에 이만한 규모의 한인타운이 들어서리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어요. 곰탕 하나에 승부를 걸었던 저와 같이 많은 한인들이 희망을 갖고 인내와 노력을 거듭한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최근 경기 침체와 함께 한인타운 경기가 크게 후퇴했어요. 전반적으로 브로드웨이 상가가 크게 위축됐고, 이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시 희망을 갖고 인내를 거듭해야할 때라고 생각합니다"며 각오를 다진다.<장래준 기자>
■ ‘가이 앤 갈’ 김원덕 사장
할렐경기 회복 또다른 기회
맨하탄 할렘에서 남성 의류판매 업체인 ‘가이 앤 갈’ 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원덕 사장은 할렘 한인상권의 산증인으로 불린다.지난 69년 미국으로 건너 온 김 사장은 양로원에서 청소일을 하다 72년 현재의 할렘 125스트릿에 의류점을 연 지 벌써 30년째.
김 사장은 "장사를 하기 위해 렌트가 싼 곳을 물색하다가 사업을 시작한 곳이 할렘이었다"며 "폐허나 다름없었던 지금의 자리에 가게 오픈을 했다"고 말했다.
처음 문을 열 당시만 해도 뉴욕시 최대 우범지대로 지역 전체 점포의 30%가 빈 상태였다는 김 사장의 설명이다.식구와 친구들이 위험하다며 할렘에 가게 여는 것을 극구 만류했지만 김 사장은 빈민층인 지역 흑인 주민들을 상대로 한 저가 마케팅을 펼치며 70년대 말까지 승승장구했다.
70년대 중반 할렘 지역에 ‘메이드 인 코리아’ 의류 열풍이 일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김 사장은 또한 식구들의 걱정과는 달리 10여 차례에 걸쳐 흑인 교회나 지역 상공회의소로부터 지역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로 감사패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사장에게도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80년을 전후해 청과상, 생선가게, 잡화상 등 한인 업소들이 할렘 지역에 대거 몰려들면서 한인상인들과 흑인 주민간의 잦은 마찰이 빚어지면서 급기야 불매운동 시위가 발생했던 것.
김 사장은 이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현재의 한인할렘 상인번영회를 창립, 1∼2대 회장을 역임하며 지역사회와 대화 창구 및 협력 체제를 구축하는데 이바지했다.
김 사장은 "최근 대형 스토어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는 등 번창일로에 있는 할렘지역을 보면 사장돼 있던 지역 경제가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 지역 경제인의 한사람으로 기쁘다"면서 "그러나 이 과정에서 한인 업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점이 가슴 한구석에 짐이 된다"고 토로했다.
김 사장은 "한인업소들에게 불리하게 변화하고 있는 영업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지역사회와 보다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대형업소에 맞선 한인업소간의 협조 체제를 더욱 강화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김노열 기자>
■ ‘해피바잉 가구’ 이희상 사장
한인 1세대에 박수 보낸다
지금의 뉴욕한인사회가 형성되기까지는 초기 정착자들의 피나는 노력과 땀이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초기 정착자들 가운데 한 명이 해피바잉 가구의 이희상(59)사장.
이 사장은 지난 71년 뉴욕으로 이민와 1년간 미국 섬유회사에서 근무한 것을 제외하고는 30년 가까이 한인 사회와 함께 호흡하며 가구업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이 사장이 해피바잉 가구를 창업한 연도는 74년. 맨하탄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한국 지상사가 하나 둘 들어서고 한인 도매상이 문을 열며 이들에게 필요한 사무용 가구를 공급할 요량으로 32가에 오픈했다.
처음에는 해피바잉 센터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내걸고 가구와 전기 재료를 판매하다 점차 가게가 팽창하며 나중엔 가구만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당시만 해도 한글 간판이 빽빽하게 들어선 지금의 32가에는 한인업소가 식당, 분식집 등 한쪽 손으로도 꼽을 수 있을 만큼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요즘 가끔 오후 늦게 맨하탄을 들를 때면 한인 사회가 화려한 32가의 밤거리만큼이나 성장했구나"한다는 게 이 사장의 회고다. 이 사장은 80년대로 들어서자 퀸즈 플러싱에 대규모 한인 밀집 거주지역이 형성되면서 88년 사업망을 확대코자 한인 가구점 처음으로 플러싱 메인스트릿에 지점을 냈다.
물밀 듯 밀려오는 한인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사업은 날로 번창했고 뉴저지 포트리에 지점을 개설했다.이 덕분에 현재까지도 해피바잉은 10년이 넘는 고객이 전체 고객의 30∼40%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간혹 25∼6년 된 고객들이 시집·장가갈 손자나 손녀들을 데리고 찾아온다는 게 이 사장의 설명이다.
하지만 90년대 중반부터 렌트 인상 등 영업환경이 나빠진데다 중국계 이민자들이 플러싱에 빠른 속도로 이주해오면서 사업이 위축, 지난 4년 전 포트리 지점을 정리하고 현재 노던블러바드 162가로 자리를 옮겼다.
이 사장은 "작은 자본, 작은 경험, 작은 언어로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성공의 이민역사를 써 온 한인 이민 1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은 심정"이라며 "1세들이 일궈온 터전 위에 2세들의 꿈을 펼칠 때"라고 말했다.<김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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