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립멤버 이범선 박사가 밝히는 ‘뉴욕한인회’
한인 미주 이민 연륜은 100년을 맞이하고 있지만 뉴욕한인 사회의 역사는 이보다 짧다. 하지만 세계의 경제 중심지인 뉴욕에 자리잡은 덕으로 한인사회가 형성된 타 도시보다 뉴욕 한인 사회는 급성장해 왔다.
뉴욕 한인사회가 이렇게 발전하기까지는 뉴욕 땅을 먼저 밟고 향수와 외로움을 이겨내면서 어려움을 극복해온 선배들의 노력이 숨어있다. 타민족에 모범이 되면서 한인 사회 발전에 이바지해온 이민 선배로부터 과거 한인 사회를 뒤돌아 본다. <편집자 주>
꽃도 옮겨 심으면 적어도 하루쯤은 시들해 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사회풍습이 전혀 다른 사회에 인간이 뿌리를 내리기란 쉽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뉴욕 한인사회의 뿌리는 어느 정도 깊게 내려, 갓 이민 온 동포에게는 물론 1세와 2세들의 든든한 받침 역할을 하고 있다.
한인사회 받침 역할을 하고 있는 대표적인 단체가 뉴욕한인회. 어느덧 42년을 맞이하고 있는 뉴욕한인회를 통해 많은 한인들이 이민생활 정착에 도움을 받았고 또 이를 중심으로 한인사회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1960년 한인들의 친목을 위해 설립된 뉴욕한인회는 한인사회와 함께 성장하며 명실공히 미 주류사회에 한인을 대표하는 단체로 자리잡았다.
부채 문제를 안고있기는 하지만 20년전 맨하탄 24가 6층 건물의 회관도 구입했고 한국대학을 설립, 한인 1세와 2세의 발전을 위한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40여년전 뉴욕 한인회 발족에 참여해 제1대 한인회(회장 서상복)의 사무총장을 역임하고 제6대 회장을 지낸 이범선(76, 회계 및 재정) 박사를 통해 뉴욕한인회의 초기 모습을 들어본다.
이 박사는 초대 한인회 집행부 임원중 현재 생존해 있는 유일한 올드 타이머이다.
이범선 박사는 롱아일랜드 유니버시티 회계학과 교수로 있으며 맨하탄 40가에 공인회계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있다. 은퇴할 연령을 훨씬 넘겼음에도 아직 투잡(Two Jobs)을 뛰는 등 젊은이 못지 않은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골프도 주 평균 3회씩 필드에 나간다고 한다.
황해도 황주가 고향인 이 박사는 서울상대 6회 졸업생으로 1955년 뉴욕대(NYU) 유학생으로 미국에 도미했다. 이 박사는 당시 뉴욕대의 한인 유학생은 10여명 정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유일한 한인교회였던 컬럼비아 대학 인근의 뉴욕한인교회에 다니며 한인들과 만남을 가졌다.
1955년 뉴욕시의 한인 수는 200여명으로 추산했었으며 이중 절반 이상이 학생이었다.뉴욕한인교회를 통해 주말마다 한인들을 만나 친목을 쌓아오다 한국에서 4.19 민주혁명,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뉴욕 한인사회에도 한국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또 한인들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순수 동포 단체가 필요하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자연히 유학생을 중심으로 한 한인회 창설 움직임이 일어났다.
뉴욕한인교회 지하실에서 열린 한인회 창설 모임에서 투표를 통해 당시 신학공부를 하던 서상복(초대 전북지사 역임)씨가 회장으로 당선됐다. 이후 오늘까지 대를 이어오고 있다. 당시 선거에는 100여명의 한인이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 뉴욕과 뉴저지 메트로폴리탄 지역의 한인 인구는 3,000명으로 추정된다.
컬럼비아대, 뉴욕대, 줄리아드대, 뉴욕시립대를 중심으로 한 한인 유학생 대표로 이 창립 회의에 참석했던 이 박사는 사무총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한인회 회의는 주로 교회 건물을 사용했고 한인 식당인 삼복이나 아리랑 식당에서 뒤풀이를 했다. 사무총장으로 뉴욕한인회가 기틀을 마련하도록 회원들의 친목을 다지는 역할을 충실히 한 그는 임기가 끝난 후 자신의 본업인 공부에 몰두 1966년 뉴욕대에서 회계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를 마치고 주위의 건의로 한인 후보로 나섰습니다. 당시 저보다 20세는 더 많은 선배들이 한인회장 일을 도맡아 해왔기 때문에 마흔을 막 넘긴 저는 러닝 메이트로 저보다 나이가 많았던 2대 회장을 지낸 강한모 선배와 출마했습니다."회장에 당선된 후 이 박사는 한인들의 소식을 전하는 한인통신을 2개월에 한번씩 발간했다.
한인 2세 및 예술계 유학생을 지원할 목적으로 기금을 모으기 위해 코리언 나이트 볼 행사를 가졌다.이 행사는 한인들이 맨하탄 월도프 아스토리아호텔에서 개최한 첫 행사였다. 행사 입장료는 10달러. 당시 뉴욕시 전철 요금이 5센트였던 시절이라 이 돈은 비교적 큰 액수였다.
행사 참가자가 200여명이었으며 5,000달러의 금액을 모았다고 이 박사는 전한다. 이 기금은 한국문화센터(KCC) 건립 기금의 모태가 됐다.
"뉴욕한인회의 역할이 많이 발전됐습니다. 초기 뉴욕한인회는 친목 중심이었습니다.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향수를 달래며 좋은 시간을 갖는데 불과했지만 지금은 뉴욕한인회가 할 일이 너무 많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간 뉴욕한인들과 호흡해 오면서 많은 2세들이 미 대형기업이나 주요직에 진출, 자신의 역할을 다해주는 것을 바라볼 때 너무 흐뭇하다는 그는 미국은 직업의 귀천이 없는 기회의 나라이기 때문에 누구나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또 미국에 이민 왔기 때문에 이 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흡수하며 신용을 중요시하고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서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민수 기자>
■뉴욕한인회 발자취
1921 유학생 중심의 뉴욕한인회 창립
1924 유학생회와 뉴욕한인교민단 발족 한인회 병합
1949 뉴욕 총영사관 주도 뉴욕한인회 발족
1960 오늘날의 뉴욕한인회 출범
1964 최초의 한인회 여성회장 당선
1969 제1차 회칙 개정으로 임원진의 2년 임기제 및 회원 회비제 실시
1972 비영리단체 인가
1980 제3차 회칙대정으로 회장 직석제와 이사제도 채택
1982 맨하탄 24가의 현 한인회 회관 건물 구입
1983 맨하탄 24가 한인회관에 한인회 사무실 입주 및 업무시작
1984 제1회 ‘한인사회를 빛낸 사람들’ 시상식
1986 ‘뉴욕한인회 25년사’ 발간, 사무자동화
1988 뉴욕한인회 부설기관으로 ‘한국대학’ 설립
1990 도서실 개관, 뉴욕한인회 30주년 기념행사
1991 소수민족 장학회 창립, ‘한미 친선단’ 결정
■뉴욕한인회 역대회장 명단
기 기간 회장 수석부회장
1 1960~61 서상복 윤지창
2 1961~63 강한모 윤지창
3 1963~65 김형린 송안나
4 1965~66 송안나 김준성
5 1966~67 한영교 김선덕
6 1967~68 이범선 강한모
7 1968~69 김판기 김일학
8 1969~70 장용호 김영걸
9 1970~71 남병학 김윤영
10 1971~72 손재룡 이동호
11 1973~74 조시학 김종환
12 1974~75 김정원 김상수
13 1975~76 김상수 *
14 1976~78 김정희 김병열/박지원
15 1978~80 이성종 허련
16 1980~82 박지원 정홍택
17 1982~84 강익조 유득종/유학종
18 1984~86 강익조 고승학/유학종
19 1986~88 조병창 박태식
20 1988~90 이문성 서삼덕
21 1990~92 변종석 김종덕
22 1992~94 김재택 김총재
23 1994~95 주명룡 이강국
24 1995~97 이정화 이기웅
25 1997~99 신만우 강숙진
26 1999~2001 이세종 윤용상
27 2001~현재 김석주 박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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