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윤병희>
스테이츠 모리스 다이크만(States Morris Dyckman)은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위해 몸부림칠 무렵 영국에 붙어 돈을 번 대표적 인물이다.
다이크만은 1755년 뉴욕의 브롱스 할렘에서 가난한 농사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농사를 지으며 힘겹게 살면서도 어려서부터 잘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동경하며 돈벌이에 혈안이 되었다. 그는 영국 귀족들이나 미국 독립 반대자들 그룹에 가까이 하면 돈을 벌 기회가 올 것으로 판단, 실행에 옮겼다.
올바니로 이사온 22세의 다이크만은 영국 귀족들과 독립 반대 그룹이 모여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식민지 지속을 다짐하는 축배를 들며 선창했다. “황제에 반대하는 놈들에게 죽음을!” 바로 그때 독립군 일개 연대가 몰려와 파티하는 이들을 모두 체포, 투옥시켰다. 물론 다이크만도 투옥되고 독립군으로의 전향하라는 요구를 받았으나 그는 완강하게 거절했다.
며칠 후 그는 맨하탄에 주둔중인 영국 군대로 도망쳐 있다 영국 군대의 후생사업을 하는 보급부대의 경리서기로 입대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맡은 일을 하는지라 보급부대장에게 인정받았다. 부대장은 그를 본국으로 보내 보급수송 훈련을 받고 다시 돌아오게 했다. 그는 독립전쟁이 벌어지자 영국군을 도와 미국의 독립군과 싸웠다.
독립전쟁 당시 미국인들은 모두 독립군 편이 아니었다. 영국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판단한 일부는 영국군을 지원하며 살 길을 찾았다. 영국에서 반드시 독립해야 한다는 사람은 독립군에 가담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사람들은 중도파로 남았다.
독립전쟁에서 영국이 패배, 영국군이 퇴각하자 독립군측은 영국군 가담자들을 처벌했다. 몇년 후 사면령을 내려 영국군에 동조한 이들의 신변을 보장해 주었다. 영국으로 도망가 있던 다이크만도 그동안 벌어서 모아둔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뻔뻔스럽게 저택을 짓고 남들 앞에 우뚝 솟아보려 했으나 5년만에 돈이 바닥나고 창피만 당하고 다시 영
국으로 돌아갔다.
밀렸던 군대 월급을 다시 계산해 받아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저택을 지었다.저택을 건축하다 마차 사고로 심하게 부상을 입어 후유증으로 손과 발에 경련이 자주 일어났다. 또 그의 헤프고 사치스러운 씀씀이가 빈털털이로 만들 때도 잦아 창피를 당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가 영국에서 돈을 갖고 돌아와 거들먹거리자 독립군에 반대하던 친영국군파의 부자인 피터 코온(Peter Corne)의 손녀딸 엘리자베스 코온과 결혼하게 됐다. 21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했으나 5년 후 돈이 바닥 나자 다이크만은 다시 영국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군대 퇴직금을 더 달라는 소송을 벌여 승소, 뭉텅이 돈을 가지고 미국에 왔다. 이때 많은 접시와 부엌 살림을 갖고 온 것이 오늘날에도 보존되어 있다.
당초 저택은 현 위치에서 15마일 남쪽에 있는 몬트로스라는 동네에 건축됐다. 이것을 1956년 현 장소로 옮겨 보존해 오고 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잡지사의 공동 창업자인 디 위트 월러스씨의 부인인 라일라 애치슨 월러스가 이 저택을 재건할 수 있도록 많은 헌금을 해 그 돈으로 이를 복원했다.
처음에는 뜯어서 쓰레기로 처리하려고 35달러에 계약했던 것을 이렇게 복원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이 저택의 뒷마당은 허드슨강을 보고 있고 강 건너에는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가 있다.
강물이 굽이쳐 흘러가는 2개의 산이 골짜기를 만들어 허드슨을 흐르게 하고 있다. 베어마운틴과 그 옆으로 베어마운틴 다리가 아련히 보인다. 안타깝게도 사진에는 나타나지 않는 정경이다.
수많은 화가들이 앉아서 건너편을 응시하며 화상을 생각하거나 급하게 손을 놀려 아웃라인을 그리는 풍경을 볼 수 있다. 이외에 가양각색의 사람들이 이곳 경치를 음미하기 위해 방문하고 있다. 이 저택 뒤쪽에는 조그만 꽃밭이 있고 먹음직스럽게 주렁주렁 달린 사과나무 밭도 있다.사랑하는 사람과 해도 해도 끝이 안나는 얘기를 하기가 가장 좋은 곳이라고 권하고 싶다. 결혼사진 촬영시에는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다이크만은 가난한 사람이 성공해 멋진 저택을 지었다는 것을 주위에 알리기 위해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축을 시작한 다음 해에 지병으로 고생하다 5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무리는 그의 젊은 부인이 하였다.
그는 이름이 피터 피취 다이크만이라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는 이 저택을 상속받고, 다시 그의 딸 엘리자 레티시아 다이크만과 그녀의 남편인
존 피취 크루거에게 넘겨주었다.
이 저택의 디자이너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저택에 창문이 2개씩 벽에 있는 것은 당시 건축가인 사무엘 와이트(Samuel Wyatt)와 그의 아들 제임스의 합작일 것이라는 추측이 유력하다.
미국을 배신하고 영국에 충성을 바쳤던 사람의 집을 정성들여 복원, 그의 유품과 역사를 배우게 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한국 부자들도 돈 쓰는 법을 한 수 배웠으면 좋겠다.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 없애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역사다. 역사에 투자하는 한국의 부자들이 많아질 때 관광한국, 역사관광의 신나는 제3의 사업이 살아날 것이다.
■ 가는 길
I-87 New York Thruway North I-84 East로 향하다 Rt. 9 South로 간다. Rt. 9-D South에서 Rt. 301 만나면 9D South로 간다. Cold Spring 마을을 거쳐 1마일 정도 가면 오른쪽으로 Boscobel 입구가 있다. 입장료 있음.
주소 : Boscobel, 1601 Route 9-D, Garrison, N.Y. 10524
전화: 845-265-3638 주 6일(화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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