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윤병희>
미국 역사에는 두 사람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있다. 이들은 시대적으로 떨어져 있지만 친척간이 된다. 제26대 디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의 조카딸이 32대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와 결혼, 엘레노어 루즈벨트(Elenor Roosevelt Roosevelt)가 된 것이다.
디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1858년 10월27일, 28 East 20 St. Manhattan, N.Y. 10003 부유한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러나 약한 체질과 지병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자라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자연히 건강해진 것은 물론 근육질이 생기고 성격도 ‘터프가이’로 변해갔다. 말 타고 특히 큰 동물을 사냥하는 것을 즐겨 군대에서도 기마대에 들어갔다.
그가 이끄는 소속부대를 ‘터프가이 기마대’란 뜻으로 ‘라프 라이더(Rough Rider)’로 불렸다. 그는 군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대령까지 진급했다. 그는 사냥을 아주 좋아해 주로 덩치 큰 곰(그리슬리)을 사냥했다. 심지어는 아프리카까지 건너가 코끼리 사냥도 즐겼다.
사냥을 하며 돌아다 보니 자연을 보존하려는 강한 생각이 들게 돼 대통령 재임 시절 국립공원을 가장 많이 지정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농사를 지으려고 노스 다코다주 마도라시의 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고 그 동네에서 농사 짓고 카우보이를 했다.
그의 젊었을 때 성격은 미국인의 전형이었다. 자기의 자녀들에게 항상 ‘가정은 행복의 본산이며 남자는 이것을 지키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그의 말처럼 행동하며 깨끗하게 살았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할만 했다. 대통령은 “국민의 청지기일 뿐이다” “진정한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는 헌법에 위반
되는 것이라도 대통령의 권한으로 바로잡겠다”고 공언하곤 했다.
정치는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처음 시작했다. 어떤 정치가의 부정이나 부패도 절대로 그대로 넘어가는 법이 없이 척결, 이름을 날렸다. 그는 ‘스퀴어 딜(Square Deal)’ 즉 ‘공정한 거래’라는 말을 좋아했다.
그에 대한 에피소드는 무척이나 많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동방에서 러일(Russo-Japan)전쟁을 중재하여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것인데, 금년 카터 전 대통령이 두번째로 노벨 평화상을 받게 되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평화상을 받았다.
노벨상 대통령이 이끈 행정부의 부정부패에 구역질과 신물이 나더라도 100년 후에 어떻게 평가할지 두고볼 일이다.루즈벨트 대통령이 러일전쟁 평화 중재를 하고 일본과 신사 협정을 서명했다.
여기에 일본인의 이민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세계전쟁이 벌어지자 연방정부 결정과는 관계 없이 서부의 한 주정부가 일본 이민자들을 수용수로 집단 이주시켜 몇 년전의 신사협정이 무산되기도 했다.
일본과의 신사 협정은 일본이 한국과 만주를 점령하는 것을 눈감아 주
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해도 좋다는 신사답지 못한 신사협정이 맺어졌다는 설도 있다. 이 설이 사실인지 모르나 한 세기가 지난 후 2차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미군과 한국군 일본군이 죽었는지 모른다.
이런 사례를 보아서도 역사는 100년 후에나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같다. 디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에는 훌륭한 지도자였을지 모르나
우리나 필리핀 민족에게는 어두운 역사를 가져다준 인물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디어도어 대통령은 첫번째 결혼은 앨리스 리 루즈벨트와 했으나 1884년 부인이 그의 모친과 같은 날 사망했다. 외로워진 루즈벨트는 다코다주로 가서 뱃랜드라는 동네에서 농장을 구입해 살다가 영국을 방문했다. 이곳에서 이디스 카로우라는 고상하고 잘 생긴 멋쟁이 미인을 만나 1886년 결혼, 미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스페인과 미국 전쟁에 중령으로 참전, ‘라프 라이더 기마연대’를 지휘하며 푸에르토리코 산 환 탈환 전투를 지휘했다.
1898년 공화당 뉴욕주지사로 당선됐다. 재임 시절 부패를 모르는 깨끗한 정부를 이끌어 다른 정치가들과 다른 행정을 보여 주었다. 이때 독점 금지법인 쉴만 법을 발효시켜 사업 독점에 철퇴를 가하는 용감무쌍한 정치인이 되었다. 그는 아치와 쿠인틴이라는 두 아들을 두고 있었다. 쿠인틴이 1차 세계대전에 참가해 프랑스의 놀만디 작전에서 전사했다.
디어도어의 친동생이던 육군 소장도 이 전쟁에서 역시 사망했다. 조카와 삼촌의 시체는 놀만디에 묻혔으나 쿠인틴의 비석은 이곳 새가모아 힐 사가의 국기 게양대 밑에 안치되어 있다.
장난감 곰 인형을 ‘테디 베어(Teddy Bear)’라고 부른다. 이것이 디어도어 대통령의 애칭인가 하는 것이 새가모아 저택 방문자들, 특히 아이들이 많은 관심을 갖고 묻는다. 그러나 안내원의 말은 ‘No, Never’이다.
루즈벨트는 항상 사냥총을 가지고 다녔다. 한번은 테네시에서 사냥을 하는데 덫에 걸린 큰 곰이 있어 총을 조준하다가 그만 두고 말았다.
덫에 걸린 곰을 쏘는 것은 잔인한 짓이고 많은 기자들 앞에서 이 짓은 못하겠다고 총을 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고통을 덜어준다는 핑계로 곰을 쏘아서 죽였다. 이것이 그 다음날 아침신문에 대서특필 되었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그곳에 없었는데 이때에 ‘엉클 테디’라는 애칭을 붙였다. 한 독일 여자가 곰인형을 만들어 미국의 소아마비 아이들에게 주려고 ‘테디 베어’를 가져왔다고 했다. 테디는 독일말로 천(Fabric)의 독일 발음이고 베어(Bear)는 영어로 곰이라는 것이다.
기운이 넘쳐 흐르듯 항상 활기에 차 있었지만 디어도어 루즈벨트는 60살에 생을 마감했다. 바로 새가모아 집에서 였다. 한편 그의 부인 이디스 카로우 루즈벨트는 이 집을 지키고 87세까지 장수했다. 위층의 햇볕이 가장 잘 드는 방에서 사망했다.
이 새가모어 저택은 23개의 베드룸이 있어 가족이 모여서 함께 살던 예전의 가족관을 짐작할 수 있다.
■ 가는 길
롱아일랜드 고속도로 I-495에서 East Exit 41 North로 간다. Route 106으로 약 8마일 북쪽으로 올라가다 Rt. 25A에서 우회전(표지판이 나옴) 한다. Cove Rd.(표지판 나옴)에서 좌회전 북향, Cove Neck Rd.를 거쳐서 Sagamore Hill Rd.로 계속 가다 이 길이 끝나는 곳이 저택이다.
주소:Sagamore Hill National Historic Site, Sagamore Hill Rd. Oyster Bay, N.Y. 전화:516-922-4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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