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선거철이면 한인사회에서 어느 단체보다 분주한 곳이 있다. 유권자 센터가 바로 그 곳이다.
오는 11월5일 선거를 앞두고도 유권자센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1만 여명의 유권자들에게 투표참여 권유 홍보지를 발송했고, 식당들을 찾아다니며 홍보전단을 뿌렸다. 바로 한인사회의 권익신장을 위해 벌이는 노력들이다. 이 센터는 ‘표는 곧 힘이다’고 믿고 평상시에는 유권자 등록, 선거철에는 투표에 더 많은 한인들을 참여시키기 위해 연중 쉬지않고 움직이고 있다.
덕분에 한인사회는 정치 참여 의식이 크게 고조되고 있다.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 5년간 이 센터를 조용히 뒤에서 후원해온 한인이 있다. 한때 맨하탄 소호빌리지에서 한인상인번영회 회장으로 상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열심히 뛴 바 있는 김재일(50. 롱아일랜드)씨가 바로 그다.
김재일씨는 생활이 크게 여유 있는 편이 아닌데도 유권자센터의 이사장 직을 맡으면서 혼자서 인건비를 제외한 모든 비용을 책임져 왔다. 실무진들에 따르면 김씨는 동 센터에 지난 5년간 매달 1,500달러에서 2,000달러를 지원해 왔다.
렌트비를 제외한 비용은 매주 토요일 2세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교사들이 토요어린이 문화학교를 운영하며 부모들을 유권자센터의 이사로 영입, 비용을 충당했다고 한다.
김씨가 이 일을 하게 된 것은 어려운 이민생활을 해오면서 미국사회의 타인종들이 한인들에 대해 갖고 있는 거부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힘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한인사회라는 공동체 개념을 그가 구체적으로 터득한 것은 1996년 맨하탄 빌리지에서 한인 운영 대성모자 가게에서 일어난 흑인고객과의 시비사건에서 비롯됐다.
이 사건은 흑인고객이 그 가게 물건이 아닌데도 바꿔달라고 요구해 일어났다. 이는 결국 한인과 흑인과의 집단적 갈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힘없는 한인업소가 폐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김씨는 이 사건에서 무기력한 한인소상인의 비애를 맛보며 결집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 때부터 김씨는 빌리지의 소상인들을 모아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상인번영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지역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알게 된 것은 그들이 한인업주들을 상당히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김씨는 이때 지역사회에 한인들이 참여하지 않고는 더 이상 상권을 지켜나가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어떻게든 단체의 힘을 키우자는 생각으로 김씨는 뉴욕대학에 재학중인 한인 대학생을 파타임으로 고용, 지역의 활동을 리서치했다. 또한 널려
있는 비영리 봉사단체들의 책임자들을 만나 한인업주들의 이미지 개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것이 계기가 돼 뉴욕대학에서 운영하던 홈리스를 위한 프로그램을 공동 운영하며 사업을 확대하게 되었다. 그는 또 커뮤니티 보드와 각 경찰서 사이에서 한인상인들의 다리역할을 맡았으며 각 지역협의회에 적극 참가했다.
전통적으로 인권기관들이 대거 몰려있는 맨하탄 다운타운에서 공권력의 부당한 대우에 항거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인권단체들을 끌어들여 함께 활동을 해나갔다. 이런 것이 인연이 돼 아직도 아시안 반 폭력대책위원회, 빌리지 인권포름이나 약자를 보호하는 협의회에서 유권자센터와 연계활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고 있다.
때문에 김씨는 오히려 한인사회보다는 아시안 단체나 한인 1.5세, 2세들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그는 또 ‘본국수재민돕기’ 뿐만 아니라 빌리지의 백인의사들 모임과 연계해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펼쳐 조지아의 카터재단과 록펠러재단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이런 활동이 기반이 되어 당시 빌리지 상인번영회의 박준구 회장이 카터재단의 세미나에 특별인사로 초청을 받기도 했다는 것이다. 한때 2세들이 중심이 돼 펼쳤던 ‘센서스 2000’ 한인사회 활동도 소호빌리지 한인상인 번영회가 맡게 되었던 것이다. 김씨는 특히 맨하탄 뿐 아니라 한인사회 공권력의 피해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며 앞장서 왔다.
조형철씨 폭행사건, 박기영씨 폭력사건, 임기택씨 피살사건,. 플러싱 솔마을 찜질방 등 공권력이 개입된 폭력사건 등 주로 정치력이 받침돼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김씨는 지난 10여 년간 해온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아무리 좋은 일도 일반 동포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면 외면 당하고 힘도 없어져 결국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됨을 구체적으로 터득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유권자 실무진들에게 그는 늘 "느리게 가도 정치력 신장은 한인사회가 단합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절대 안 되는 사안"이라고 강조한다. 김씨는 마틴 루터킹 목사를 존경하고 인정하지만 인권옹호와 권익을 지키고 쟁취하는 방식으로는 말콤엑스의 경우에서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역설한다.
김씨는 대망의 뜻을 품고 81년 무일푼으로 아무 연고도 없이 뉴욕에 왔다. 도착 즉시 한인식당의 말단 종업원으로 이민생활을 혹독하게 시작했다고 한다. 맨하탄, 브루클린에서 페들러로 돈을 모으기 시작, 빌리지의 한 가게에서 일을 배운 후 87년도 잡화가게를 열게 되었다.
87년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다. 현재 빌리지의 잡화가게 외에 플러싱 메인스트릿 41애비뉴 소재 식당 ‘산’을 새로 인수해 운영중이다.
■유권자센터와의 인연
1.5세 주축 유권자등록운동에 가세
미주 한인사회는 이민 역사 100년이라고 하지만 아직 활착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같은 현실에 대해 생각이 깊은 한인들은 리더쉽 부재를 제일 큰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1965년 이민법 개정으로 아시안 이민자들이 물밀 듯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한인사회가 대도시에 하나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기 시작한 본격적인 이민 역사는 30년이라고 해도 무리
는 아닐 것이다.
숫자가 늘어나 실질적인 하나의 인종집단을 이루었음에도 한인들의 뿌리는 예나 지금이나 허약하기 짝이 없는 현실이다. 생존을 위한 생업에 매달리느라 한인사회 좌표를 미국사회 시스템에 견인시키려는 노력이 전무했었다.
때문에 지금도 다른 여타 이민인종 그룹에 비해 폐쇄적인 성향을 갖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가운데 LA에서 흑인폭동 사건이 터졌으며 그 이전 뉴욕에서도 자마이카나 브루클린에서 흑인사회와 집단적인 갈등이 빚어졌다.
그러나 흑인들과의 장기적인 화해를 주장하는 1.5세들의 의견은 힘을 과시하고 대결불사라는 1세들의 주장으로 무시되고 말았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폭동사건의 결말을 지켜보면서 주류사회에서 자기 일 만을 생각하며 잘 나가던 1.5세, 2세들이 자신들이 속한 커뮤니티에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
전국적으로 크고 작은 규모의 세미나와 간담회를 통한 논의 끝에 합법적인 정치력, 한인의 집단적인 정치적 힘이 아니고는 대안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것을 계기로 뉴욕의 1.5세들이 중심이 돼 94년도부터 유권자등록운동이 시작됐다. 이것이 바로 지금 뉴욕. 뉴저지 한인유권자센터의 설립배경이다. 94년 아직 한인사회에 이 운동이 본격화되기 전에 ‘한뜻 열린 마당’이라는 1.5세 단체들이 타 지역 1.5세들과 연계, 뉴욕의 각 지역, 직능단체를 순회하면서 유권자등록, 투표참여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맨하탄 빌리지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인소상인들의 모임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곳 총무 일을 보던 김재일씨가 책임을 맡아 실무는 1.5세 청년들이, 그리고 소요되는 비용은 소상인들이 맡기로 합의, 준비 끝에 96년 한인타운 플러싱에 뉴욕한인유권자센터를 비영리기관으로 설립하게 되었다.
당시 유권자등록 캠페인은 이미 중부퀸즈한인회와 뉴욕한인회에서 벌이고 있었지만 투표참여라는 핵심적인 과제에는 그렇게 접근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권자센터는 시민권취득, 시민권교육, 유권자등록, 투표참여, 유권자관리까지 방대한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김재일씨가 유권자센터와 인연이 된 것은 이러한 한인사회 정치력신장이라는 과제를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여주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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