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년특집
▶ 한국 최초 대규모 예산. 참가행사
퀸즈의 심장 플러싱 메도우 코로나 팍의 상징인 지구본(Unisphere)은 뉴욕의 한인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지금부터 38년전 1964년 완공된 지구본은 제2회 뉴욕세계박람회를 기념해 세워진 것.제2회 뉴욕세계박람회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미국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참가한 경제 행사이다. 대한무역진흥공사 기록에 따르면 한국이 가장 많은 예산을 들여서 대규모로 참가한 최초의 행사라고 돼 있다.
이 박람회에 참가한 한국 방문단은 총364명. 한국 업체로는 17개회사가 참석해 뉴욕에 한국 상품을 소개했다.
이 박람회는 1964~1965년 2년(여름시즌만 개장)에 거쳐 장기간 열린 행사로 한국 참가자 2/3 이상이 미국에 눌려 앉는 등 공식적으로 가장 많은 상업 종사자 한인이 미국에 자리잡고 또 공식적인 한국상품 무역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이때 참석한 한인 업체는 금강산, 한국회관 등 식당 2개업소, 국제상사, 중앙공예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 텍스타일업체, 오명자 무용단, 태권도 시범단이 참가했다.
■ 대한무역진흥공사가 담당
뉴욕한인 경제의 초석이 된 이 박람회는 대한무역진흥공사(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준비한 사업으로 1962년6월 미국과 공식적으로 참가계약을 체결했다.
박람회 규모는 대지 79만평, 연건평 10만여평(380만7,079스퀘어피트)에 달했으며 미당국의 투자액만해도 10억달러가 됐다. 유럽, 아프리카, 중동아시아, 남미, 아시아에서 36개국이 참가했으며 코카콜라, 코닥, 드퐁 등 세계적인 기업이 참가, 200개가 넘는 관이 세워졌다.
대한무역진흥공사도 한국의 지원으로 1963년 7월 한국관 기공에 들어가 1964년 4월22일 내부장치까지 완공시켰다.한국관은 김중업씨의 설계로 본관과 별관 등이 만들어졌으며 실제 크기의 다보탑 모형이 한국관 앞에 놓여졌다. 한국관 설립 예산으로 112만달러(1억9,000만원)이 설정됐었다.
■ 한국관 눈길끌어
한국관은 총 658평(2만3,700스퀘어피트)으로 본관에는 산업전시장과 문화 전시장, 직매장이 자리잡았다. 본관에 투입된 직원은 132명였으며 본관의 크기는 5,040스퀘어피트였다.
별관은 식당으로 한국회관과 금강산이 위치했다. 별관에 투입된 인원은 232명이며 크기는 8,720스퀘어피트이다.제2회 뉴욕세계박람회는 1964년 4월22일부터 10월18일, 1965년에는 4월21일부터 10월17일까지 총365일 열렸다.입장료는 일반 2달러, 어린이가 1달러였다. 전체 입장객은 5,800만명이며 이중 320만명이 한국관을 입장했다.
한국회관과 금강산은 갈비, 불고기, 잡채, 냉면, 찌개 등 한국의 대표적인 음식을 판매, 미 언론들과 외국인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았다.
한국관은 다른 관에 비교해 손색이 없을 만큼 말끔했다.
■ 실적 82만달러
이 박람회은 한국이란 국가를 뉴욕에 소개한 것으로 한국을 전쟁이 발발했던 나라로만 알고 있던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기는 기회가 됐다.
한국 상품전시, 한국상품 직매, 한국 음식 판매, 한국 문화 소개 등으로 전통과 문화풍속을 홍보하는 행사로 거듭났다.
특히 비단의 우수성을 알리는 자리로 상품 수출의 실적을 올리는 등 선진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누어 한국 상품이 소개됐다.대한무역진흥공사의 기록에 따르면 직판 실전이 82만달러로 기록돼 있으며 박람회 기간동안
애틀랜틱 시티 프레스가 231회, 뉴욕포스트는 83회 한국관과 한국을 소개했다. 미 TV방송에는 1964년도 회기중 17회, 1965년 회기중에는 96회 상영됐다고 기록돼 있다.
한편 당시만 해도 한국의 외환이 적고 관리가 까다로워 현지획득 외화에 대한 관리가 엄격했다.
■ 퀸즈의 한인 이민사회 조성 계기
박람회에 투입된 350여명의 한인들은 박람회장에서 가까운 곳에 아파트나 집을 얻어 거주했다. 당시 대부분의 한인이 맨하탄 컬럼비아 대학 인근이나 브루클린에 거주했던 것과 달리 이들은 큐가든이나 엘머스트 등에 자리를 잡았다.
방문단은 단기취업 비자로 입국했으나 대부분이 입국 전부터 미국에 영주할 목적이 있었다고 당시 방문단들은 전한다. 이들은 첫해 여름은 박람회장에서 근무를 했지만 박람회장이 폐쇄되는 겨울동안에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한국회관의 경우 1964년 맨하탄 127 W 43St.에 삼복식당을 개점했다. 서울 소공동에서 한국회관을 경영하던 김하식·송기화 부부는 박람회장이 문을 닫는 기간동안 43가에 삼복식당을 열어 직원 30여명을 이곳에 투입시켰다. 삼복식당은 당시 아리안 식당과 뉴욕 최대의 식당으로 자리잡아 갔으며 5년후인 1970년 삼복식품점을 열어 한국 식품을 판매했다.
다른 한인들도 겨울철 일자리를 찾으러 했으나 쉽지만은 않았었다. 맨하탄의 삼복식품점은 80년대 문을 닫았지만 플러싱과 뉴저지 포트지 지점은 90년대까지 운영됐었다.
■ 방문단 일원 송종국 옹
"손에 물 마를 날 없던 이민생활. 새로운 것 도전하는 삶이 좋아"
"방문단 대부분이 미국에 남아있길 원했죠. 저도 물론 비행기에 타기 전부터 영주를 목적으로 했습니다."
1964년 방문단의 일원으로 뉴욕에 도착한 송종국(74, 롱아일랜드 이스트메도우 거주)씨는 미국이란 대륙에 향하면서 큰 각오를 가졌다고 한다.
평양보고를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전쟁반발로 입대한 그는 미 8군에서 근무하면서 미국 문화를 접했기에 이 방문의 기회를 통해 이민을 계획했다.
부인과 함께 동경에 가서 LA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다시 뉴욕으로 온 송씨는 당시 박람회 참가자들은 인삼, 놋그릇, 옥돌, 조화, 실크 등을 가져왔다고 전한다."모두들 고생이 많았다"는 그는 "한국사람이기에 어디를 가나 눈에 띄워 박람회 몰래 남은 한인들은 취직도 힘들었고 비자 얻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송씨는 당시 한국회관 주인인 고모부 김하식씨와 고모 송기화씨를 따라 매니저로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고생이 덜했다고. 하지만 서울에 두고 온 3자녀에 대한 그리움과 외롭고 힘든 이민생활로 삶의 터전을 이루기 위해 잠을 5시간으로 줄이며 생활했다.
박람회가 끝난후 2년간은 맨하탄의 삼복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1967년 독립해 퀸즈 80-08 루즈벨트 애비뉴에 ‘동양 그로서리’를 개업했다. 동양 그로서리는 송씨가 손을 떼면서 아시안마트로 이름이 바꿨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차이나타운에 가서 식품을 구입해오고 낮에는 장사를 했습니다. 가게 문을 닫은 밤에는 부인과 판매할 김치를 만들었습니다. 손에 물이 마르지 않았죠. 다행히 도미 후 와이프가 넷째을 가져 그애명으로 형제초청해 한국의 자녀들을 데려올 수 있었어요. 당시 형제초정 비자를 받기위해 3년정도 기다렸는데 아이들이 올 때쯤 아는 분을 통해 영주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송씨에 따르면 그의 첫 딸은 PS189에 입학한 첫 한인 학생. 이어 그는 현재의 플러싱 전등사 자리의 주택을 구입했고 루즈벨트 애비뉴(현 패션시티 자리)의 웨딩드레스점을 인수, 업종을 바꿨다. 하지만 부인의 죽음과 자녀들이 대학 입학과 경영 부진으로 파산을 하게됐다.
그 이후 부동산 브로커, 비크맨스쿨 어소시에이트 디렉터 등으로 일하다가 지금은 롱아일랜드의 한 의류 체인점 심즈에서 근무하고 있다.
"지금은 한인들이 많아 뉴욕생활이 편하지만 당시만 해도 영어를 배우지 않고 미 문화를 배우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든 생활이었다"고 회고하는 그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좋다며 요즘은 컴퓨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고 한다.
<이민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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