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년특집
▶ 맨하탄 한복판에 ‘코리아타운’ 형성..타인종 질시받으며 삶의 터전 확대
미주 지역 한인 이민 역사는 100년이지만 뉴욕의 한인 이민 역사는 이보다 짧은 50여년에 불과하다. 이 기간 뉴욕의 한인들은 급속한 경제적 성장과 정치력을 만들어냈다. 뉴욕과 뉴저지 일대 한인 상가가 곳곳에 형성돼 있으며 높은 교육열로 주류 사회에 빠르게 진출해왔다. 지난 50~60년대 유학생과 주재원 중심의 ‘초창기’ 시대로, 70-80년대를 ‘과도기’로, 90~2000년대를 ‘성장기’로 구분해 뉴욕의 한인 이민 역사를 돌아본다. <편집자 주>
■ 초창기(50~60년대)
이민이 제한적으로 이뤄진 시기로 뉴욕 한인사회는 유학생과 지상사 주재원 등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정확한 인구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1,000명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다.한국전으로 인해 한인 입양아와 국제결혼자들이 크게 증가했지만 이들이 한인사회에 포함되지 않았다.
당시 한인사회는 유학생들이 주도해나갔으며 교통 등의 문제로 대부분 맨하탄에 거주했고, 한인 식당도 아리랑식당 등 2~3곳에 불과했다.
당시는 한인 경제라는 개념조차 없었지만 60년대부터 가발 비즈니스가 주종을 이뤘다.당시 맨하탄 브로드웨이 상가는 유태계와 인도계 도매상들이 활동하며 일정 규모의 상권을 형성한 도매상가가 존재했지만 사실상 죽어가는 지역이었다.이때 수출입국의 기치 아래 미국에 진출한 한국기업과 자생적으로 비즈니스를 하던 한인들이 사무실과 임대료가 싼 브로드웨이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초기 한인업체들은 대부분 가발과 관련된 업종으로 사무실 내에서 주로 영업하는 형태였다. 가발은 당시 수입업자 도매상, 소매상의 유통 과정을 거치는 동안 상당한 마진을 얻을 수있었고 한국내 생산업체들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자본력이 부족했던 한인들에게 좋은 아이템이었다.
이같은 한인 상인들의 출현은 1967년 경제인 구락부, 청소년상공회의소 등의 조직을 배태시켜 상인들을 결속시키게 만들었다. 한국외환은행이 처음으로 맨하탄에 문을 열면서 동포들을 대상으로 금융활동을 시작했다.
한인 이민 물꼬를 튼 것은 68년 이민 개정법(Hart-Celler Act)이 통과되면서다.이민 개정법의 통과로 70년대 들어서 한인 이민자들이 물밀 듯이 유입되고 한인사회가 본격적인 틀을 만들기 시작했다.
■ 발전기(70~80년대)
이민법이 개정된 후 이민자의 수는 70년대 들어서면서 크게 증가한다. 70~79년 34%, 이후에는 48%가 늘었다. 한인 이민자는 60년대 1,500~2,000명에서 69년 6,045명, 70년 9,314명, 73년 2만명, 76년부터는 매년 3만명 이상이 미국에 들어왔다.
특히 75년 이후의 한인 이민자들은 교육 수준이 높고 대부분 가족 이민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인 삶을 개척하게 된다.거주지역도 맨하탄에서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맨하탄으로의 교통이 편한 퀸즈 엘머스트 지역과 브롱스 일대에 한인 거주자들이 늘어났으며 교육에 대한 열의와 부동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기 시작한 때다.
사회 및 경제단체들도 우후죽순격으로 생겼다. 인구 증가에 따라 전문 분야가 크게 다양해진 탓이다.또 한국계 지상사들이 활발하게 진출, 지상사협의회가 발족됐으며 무역협회는 한국센터 빌딩을 구입, 영사관과 지상사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80년대에는 한국계 은행들이 본격적으로 지점을 개점했다. 외환은행에 이어 제일은행과 상업은행도 맨하탄에 점포를 개설하고 영업을 시작했다. 또 86년에는 순수 한인 자본으로 만든 엠파이어스테이트은행과 브로드웨이내셔널은행이 개점했다.
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가발산업이 사양길로 들어서자 한인들은 업종을 다변화하게 된다. 가발 외에도 모자, 주얼리, 신발을 취급하는 도매상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에는 40여개의 한인 도매상이 들어서 한인상권이 제대로 골격을 갖춰나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인 상권은 급속한 팽창을 거듭하며 브루클린, 브롱스, 퀸즈 자메이카, 맨하탄 할렘 등 주로 흑인 지역에 한인 소매점들이 속속 들어섰다.
브루클린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 플랫부시, 브라이튼 비치, 벤슨허스트·베이릿지, 풀턴 스트릿 등 4개지역을 중심으로 한인 상권이 형성됐고 브롱스는 포담을 비롯해 벨몬트, 베드포드 지역에서 한인비즈니스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특히 이 시기는 지사, 상사 진출이 러시를 이루면서 지사협의회가 만들어졌으며 가발업 등 잡화에 이어 청과업에 침투하기 시작한 한인 상인들은 소매업의 기반을 다지기 시작, 75년 10월 청과상조회를 설립시켰다.
79년에는 현재의 경제인협회 전신인 브로드웨이한인상인번영회가 결성됐으며 이 때를 중심으로 맨하탄 32가가 한인타운의 면모를 갖춰나갔다.
또한 70년대 초반까지 독일계를 비롯 그리스, 아이리시 등 백인계가 주로 거주하던 플러싱 지역이 한인 주거지역으로 형성돼 갔다. 플러싱은 초기 경제적으로 안정된 지상사 공관 주재원들이 살기 시작했다가 점차 맨하탄은 물론 브롱스, 브루클린에서 비즈니스를 하던 한인들이 이곳으로 몰려들면서 한인타운으로 변했다.
80년대에는 뉴욕한인 경제사의 황금시대였다. 브로드웨이에는 한 때 한인상가가 200개를 넘어섰고 32가를 중심으로 식당을 비롯해 도소매업소들이 들어서 최대 호황기를 구가했다.플러싱 역시 80년대 초반 한인인구가 1만명을 넘어서면서 메인스트릿과 루즈벨트 애비뉴를 중심으로 상권이 급속히 퍼져갔다. 특히 플러싱은 주거지역이었던 만큼 다른 상권과는 달리
식당, 수퍼마켓, 선물가게, 서점, 보험, 의류점, 여행사 등 의식주와 관련된 업종들이 주류를 이뤘다.
■ 성장기(90~2000년대)
지난 2000년 연방센서스 조사 결과 뉴욕의 한인 인구는 11만9,846명, 뉴저지는 6만5,349명, 커네티컷은 7,064명으로 집계됐다. 뉴욕주 인구는 90년 대비 25.3% 증가했으며 뉴저지주도 69.5% 늘어난 수치다.
사회적으로는 한인사회의 정치력 및 권익 신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기 시작했다.90년 브루클린의 처치애비뉴에서 일어난 ‘레드 애플’과 ‘처치 프루츠’에서 발생한 흑인 고객과의 마찰은 한흑간의 갈등으로 발전했고 이로 인해 한인사회는 정치력 신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당시 한인들은 인종 화합을 강조하며 ‘9.18 평화대회’를 개최, 한인 1만여명의 힘을 결집하는 행사를 벌이면서 이후 유권자등록운동과 투표 참여 운동으로 확대된다.
90년대 들어서면서 한인 경제는 위축되는 모습을 보였다.
미국경제가 불황에 빠지자 한인상권도 연쇄적으로 어려움을 겪게 된 것이다. 더구나 이때부터 한국에서 유입되는 한인이 이민자가 아닌 유학생, 지상사원 등으로 변화되면서 상권 역시 새로운 변신이 요구된 시기이기도 하다.
브로드웨이 도매상가는 점차 경쟁력이 위축돼 하나 둘씩 한인업소들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32가 한인타운은 도매상 관련업소에서 한인 유학생과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품목과 서비스를 판매하는 등 교체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발전을 거듭하던 플러싱 한인상권도 위기를 맞았다. 한인업체끼리 과당경쟁을 벌이면서 렌트 폭등을 불러왔고 90년대 중반 이후 중국인 유입이 크게 늘면서 점차 메인스트릿 상권을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김주찬·김노열 기자>
■ 뉴욕한인 이민사의 산증인 하세종씨
하세종(68)씨는 뉴욕한인 이민 역사의 산 증인이다.
지난 56년 유학생으로 미국에 온 뒤 62년부터 40년간 줄곧 뉴욕에서 살았다. 한국전 당시 미군 8군 통신대에서 근무했던 하씨는 포화로 벌거숭이가 된 조국 산의 녹화방법을 공부하기 위해 한국을 떠났다. 당시 화물선을 타고 한달에 걸쳐 시애틀에 도착했다.
애리조나주립대에서 산림학 외에도 경제학과 국제무역경영학을 공부한 하씨가 뉴욕에 온 것은 광고회사인 매칸-에릭슨사에서 스카웃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62년 청운의 꿈을 안고 뉴욕에 왔을 당시 한인은 700여명에 불과했다고 한다.유학생과 주재원, 국제결혼자 등 당시 한인들은 맨하탄 72가 인근에 대부분 거주했으며 뉴욕 최초의 한인식당인 아리랑 식당이 개업했을 때였다.
하씨는 "입양된 한인들도 상당수 있었지만 대부분 유학생과 주재원이 주를 이뤘으며 가족과 같은 분위기였다"고 회고한다.당시만해도 한인 비즈니스라곤 없었지만 뉴욕한인 경제의 토대가 된 가발 비즈니스가 태동
하는 시기였다.하씨는 "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이 태동하면서 뉴욕 지역에서도 흑인 폭동 등이 종종 일어났고 이로 인해 백인 거주 지역이었던 맨하탄 브로드웨이 지역이 텅텅 비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씨의 회고에 따르면 67년대 당시 이민 쿼타 제한이 폐지되고 70년대 한인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브로드웨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인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70년대와 80년대는 한인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되고 미국 경제와 함께 한인 경제도 부흥기를 맞는 시기다. 한인들은 무역과 청과, 세탁, 수산 등 여러 업종에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 한인사회도 JC와 경제인협회 등 여러 분야의 단체들이 친목을 중심으로 단체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생겨났다.하씨는 80년대 이후를 한인사회의 부흥기이면서 과도기라고 평가하면서 앞으로 10~20년 정도는 과도기가 계속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인 비즈니스가 미국 경기 호황과 맞물려 전성기를 맞았지만 한 단계 이상의 성장을 하지 못한 아쉬움도 있다"고 돌아본다. 이는 한인 자본이 축적되지 못한 때문이다. 하씨는 "한인 금융이 미약하고 과당 경쟁이 시작됐으며 비즈니스를 한 단계 끌어 올리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또 노동집약적인 한인 비즈니스의 성격상 가족 중심의 노동으로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도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기도 했다는 것. 90년대 초반 한인 청소년 문제가 재연되지 않도록 정체성을 심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하씨는 40년간 뉴욕에 거주하면서 한인사회의 발전에도 큰 노력을 해왔다. JC 창립멤버이며 70년대 한국 TV방송주식회사를 운영하기도 했고, 80년 당시 센서스 한인 추진위원장, 롱아일랜드한인회장, 아시안헤리티지재단 창립멤버 등 다양한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하씨는 "많은 것을 한꺼번에 이루기보다는 한인들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도록 권익 신장에 힘써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김주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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