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년특집
▶ 1907년 황용성 등 ‘공제회’ 조직...하와이 이민자 일부도 뉴욕 이주
1902년 제물포에서 한인 102명이 일본 여객선 겐카마루에 몸을 싣고 나가사키로 떠났다. 3년간의 노동계약에 따라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 향한 이들은 나카사키에서 이듬해 1월2일 미국국적 증기선 ‘게일릭호’에 승선, 10일 간의 항해 끝에 1903년 1월13일 새벽 3시30분 호놀룰루항에 입항했다. 미주한인 이민 100년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선조들이다.
그후 1905년 7월에 이르기까지 태평양을 항해한 132편의 이민선은 7,843명의 한인을 하와이로 이주시켰으며 2003년 현재 미주 전역에 약 200만명의 한인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미주 지역 초창기 이민사는 항일 독립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선말 선각자들이 신대륙 미국에서 일본의 횡포와 탄압을 전 세계에 알리려 노력했으며 심지어 선인장 농장에 취업한 노동자들까지도 독립자금을 보탰다.
이런 의미에서 미주 한인 독립유공자들과 그들의 업적을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건국 후 미주지역에서 훈·포장에 추서된 독립유공자는 80여명에 달한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에 추서된 유공자 안창호, 서재필, 이승만, 임병직 선생 등을 비롯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박용만 선생과 장인환, 전명운 열사 등이 있다.또 건국훈장 독립장에 김용선 선생 등 20명, 건국훈장 애국장에 강혜원 여사 등 17명, 건국훈장 애족장에 강원신 여사 등 25명, 건국포장에 강영각 선생 등 11명이다.
이들은 미주지역을 무대로 일본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독립자금을 모아 항일 운동을 지원하는 등 태평양 건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크게 이바지한 초기 미주한인들이다.
첫 이민자들이 하와이 땅을 밟고 불과 8개월 후인 1903년 8월7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감리교인인 홍승하, 윤병구, 문홍식, 박윤섭, 임치성, 임형주, 김정국, 안정수, 이교당 등의 발기로 ‘신민회’가 조직됐다. 홍승하가 회장으로 출범한 이 조직은 구국정신을 고취, 일본의 침략행위에 제동을 거는데 있었으며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을 강령으로 삼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같은해 9월12일 도산 안창호의 지도와 박성겸, 이대위, 김성무, 박영순, 장경, 김찬일, 김병모, 전동상, 박승지 등의 발기로 미주 본토 최초 한인단체인 ‘친목회’가 조직됐다. 안창호를 회장으로 이 단체가 출범할 시기 한인동포의 수는 25명에 불과했다.
발족후 급속히 확장된 ‘친목회’는 1905년 4월 ‘공립협회’로 명칭을 변경, 활동했으며 활동 목적은 동족상애, 환란상부, 항일운동이었다.이같이 시작된 미주 한인들의 항일운동은 1909년 ‘공립협회’와 ‘합성협회’가 발전적으로 통합한 ‘국민회’가 1910년 5월 ‘대동보국회’를 흡수하며 ‘대한인국민회’로 탄생, 미주 한인사회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자리잡으며 체계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특히 뉴욕은 유럽에서 미국에 도착하는 외국인들의 입국 심사소인 엘리스 아일랜드가 위치해있어 중국, 유럽, 미국 등을 오가며 국제차원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초기 미주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많이 남겼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가 한창 활동할 당시인 1907년 7월 뉴욕시에서는 황용성, 서필순, 안정수, 이원익, 신성구, 김승제, 차두환, 안규선, 양흥빈, 송헌길, 윤석규 등의 발기로 ‘공제회’가 조직되었다.
1903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홍승하, 윤병구 등과 함께 미주한인 최초의 정치 단체인 ‘신민회’를 발족시킨 바 있는 안정수를 회장으로 뉴욕에서 발족된 이 단체의 목적도 역시 동족상조와 항일운동이었다.
공제회가 조직됐을 당시 고종(1852∼1919년) 황제의 밀사로 1907년 7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의 제2회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시도했다 실패한 이상설, 이위종이 현지에서 숨진 이준(1859∼1907년)의 장례식을 치른 뒤 영국을 경유해 같은 해 8월1일 뉴욕에 도착했다. 버지니아주 로아녹대학에서 공부하다 이상설과 이위종을 돕기 위해 헤이그로 건너가 통역관으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한 송헌주(1880∼1965년)는 이듬해인 1908년 3월 다시 뉴욕으로 귀환했다.
1903년 하와이 농장 노동자 모집시 지원, 하와이에서 일하던 천세헌(1881∼1945년)은 1910년 뉴욕으로 이주, 당시 해외 한인의 최고 통일연합기관인 대한인국민회 북미지방총회 뉴욕지회에 가입, 항일운동에 몰두했다.
또 이승만과 함께 ‘한인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하는 한편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수학한 정한경(1891∼1995년)은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 세계 제1차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되자 태평양 연안 및 뉴욕 거주 동포들을 중심으로 김규식(1881∼?)과 함께 ‘신고려회’를 조직해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입장을 피력할 계획을 세웠다.
1919년 11월 이승만을 따라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정무위원 취임식에 참석한 뒤 1920년 임시정부 상임위원회 군무위원 및 정무조사특별위원회 외정분과 위원으로 선임돼 활동한 안현경(1881년∼?)도 뉴욕과 인연이 깊다. 그는 1920년 4월 현순(1880∼1968년)과 함께 상해에서 프랑스를 거처 뉴욕에 도착, 하와이로 돌아가기 전까지 약 5개월간 뉴욕에서 활동했다.
미국에서 유학하던 중 미국이 세계 제1차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자원 입대한 황기환(?∼1923년)은 1921년 5월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부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친우회’를 조직했다. 같은해 7월 임시정부 외교부 런던주재 외교위원 및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다 뉴욕으로 돌아와 1923년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했다.
이들 외에도 뉴저지주 프린스턴대학 신학과에서 1937년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애국단체인 ‘동지회’, ‘교민회’를 조직, 활동한 정운수(1903∼1986년), 1928년 6월 뉴욕에서 3·1신보 창간에 참여, 사장인 허정을 중심으로 컬럼비아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김도연(1894∼1967년), 김양수(1896∼1971년) 등과 편집을 맡아 일한 윤지영(1898∼?),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뉴욕에서 중국후원회와 조선의용대후원회를 결성한 변준호(1895∼1966년) 등이 뉴욕 뉴저지를 근거로 항일, 독립운동을 펼친 지사들이다.
<신용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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