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년특집
▶ 뉴욕 한인교회는 이민사회의 뿌리
미주한인이민사는 교회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특수한 관계가 있다. 종친회 중심의 중국계나 현민회 중심의 일본계와는 달리 오늘날 미주한인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뉴욕한인교회협의회의 통계만 보더라도 2002년 현재 뉴욕 및 뉴저지 일원의 한인교회 수는 600개이며 전체 한인인구의 40% 이상이 기독교를 신앙으로 삼고 있다.
이는 본격적인 미주한인이민사의 효시가 됐던 하와이 농장이민이 교인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역사적 배경에서 크게 기인한다. 이민 초창기부터 지난 100년간 교회는 한인 이민자들에게 신앙으로서 뿐 아니라 중요한 이민생활의 공간 역할을 제공해왔다.
미주한인이민사가 그렇듯 뉴욕한인사회도 교회가 중심이 돼 본격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으며 여기에 1922년 맨하탄에 설립된 미동부 최초의 한인교회 ‘뉴욕한인교회’가 중심에 서 있었다. 뉴욕한인교회의 80년 발자취를 통해 뉴욕동포사회의 초창기 형성 과정을 되짚어 본다.<편집자>
□뉴욕한인교회 창립과 이민사회□
▶뉴욕한인교회의 창립 역사적 배경
뉴욕한인이민사의 본격적인 시작은 하와이를 중심으로 한 서부에서 한인교회의 이민 초창기 성장시대가 막 끝나던 시기, 즉 뉴욕한인교회가 창립됐던 1920년 경과 때를 같이한다. 이 당시 정치적으로는 국민회와 동지회, 상해임시정부와 구미위원부의 갈등이 심각해지면서 미주에서의 독립운동 중심이 서서히 서부로부터 동부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특히 1919년 4월16∼19일 서재필 박사의 주도하에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제1차 한인의회는 독립운동가들이 동부로 옮겨오는 계기가 됐다.또한 이 시기는 미국 이민 생활의 정착단계에 접어든 하와이, 캘리포니아 지역의 유학생들이 하나, 둘 뉴욕이나 필라델피아, 워싱턴 등 동부의 명문학교를 찾아 이동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같은 여러 가지 요인으로 1920년 전 까지만 해도 20∼30명에 불과했던 뉴욕일원 한인인구는 300여명으로 급격히 늘어나게 됐으며 뉴욕 한인들에게도 단체나 기관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당시 인구 분포는 대부분 유학생과 서부에서 이주해 온 이민자, 그리고 일제 치하에 맞선 정치 망명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특이한 점은 이들 중 절반 이상이 넘는 인구가 기독교인 신분이었다는 것으로 이들은 뉴욕한인교회가 설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미동부 최초의 한인교회 탄생
뉴욕한인교회는 1920년경부터 맨하탄 메디슨애브뉴 소재 미국 감리교회를 빌려 예배를 보다 임종순 목사의 주도하에 한국감리교단과 뉴욕한인들의 자금원조로 미동부에서는 최초로 1922년 4월18일 맨하탄 21가(459west)에 자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당시 건물구입 가격은 1만7,000달러로 규모는 4층 벽돌 건물(지하실 포함)로서 대지 면적은 17 1/2X100피트였다. 감리교 뉴욕연회 기록에 따르면 교인은 대부분 학생과 이민자, 독립 운동가들로 구성돼 있었다.
이후 학생 교회적 성격이 강했던 뉴욕한인교회는 1927년 콜롬비아 대학 정문 앞에 위치한 115가 건물로 이전, 현재까지 75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초창기 뉴욕한인교회는 하와이와 캘리포니아에 설립됐던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이민자들에게 신앙 교육과 함께 이민생활에 필요한 정보 등을 제공하며 이민사회의 구심적 역할을 했다.
무엇보다 창립 초창기 때는 이렇다할 한인사회 단체가 없던 당시에 일제에 맞선 민족운동의 핵심체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3.1운동 이후 피폐해진 미 동부지역의 독립운동 역량을 결집시켜 일제에 대한 총체적 저항을 추구해야 할 시대적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한인사회 대표기관으로서의 뉴욕한인교회
뉴욕한인교회가 이민 교회를 지향하고자 했던 것은 ‘코리아 처어치 앤드 인스티튜트’(Korea Church and Institute)란 영어명칭에 드러나고 있다.
인스티튜트란 문구에서 나타나듯이 초창기 시절부터 이민자들을 위한 신앙 교육은 물론 당시 한인사회의 주축이었던 유학생들의 학습 및 모임 공간 뿐 아니라 많은 항일 애국지사들에게 거처를 제공하는 기관으로서 역할도 수행했다.
1923년과 1925년 각각 창간된 ‘유미학생영문보’와 유미조선학생총회의 기관지 ‘우라키’는 뉴욕한인교회 교인들이 직접 제작, 배포했던 잡지였던 것과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지부 등 여러 항일 단체들에게 각종 활동의 공간을 마련해 준 것이 좋은 예다.
특히 1966년 11월 한글학교를 최초로 개설, 어린이들에게 한글과 한국문화를 가르쳐 한국의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보존하는 것은 물론 1969년에는 뉴욕지역 한인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어린이 동화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이처럼 뉴욕한인교회는 교회 생활을 통한 친교 및 문화, 교육 사업은 물론 미주의 한인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가며 초창기 이민자들이 뉴욕에 정착할 수 있도록 나침반 역할을 전개해 나갔다.
▶뉴욕한인교회와 뉴욕한인회
미주로 새롭게 이주해 오는 한인들이 급격히 증가했던 1960년대에 들어서며 뉴욕한인교회는 물론 뉴욕한인사회는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1960년대 초 브루클린한인중앙교회와 뉴저지한인교회를 시초로 새로운 한인교회들이 탄생하기 시작하면서 1920년∼1960년까지 뉴욕한인사회를 대표했던 뉴욕한인교회의 역사적 독점시대는 마감됐다.
또 뉴욕동포사적인 관점에서는 한인사회의 주역이 유학생이나 정부관료가 아닌 일반 상인들로 대치,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도매, 잡화, 의류, 청과, 수산업 등으로 빠르게 확대해 갔다.
이러한 시점에 지금의 뉴욕한인회는 1960년 6월12일 뉴욕한인교회 예배실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발족됐다. 한인회란 명칭을 이용한 단체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순수 한인단체라는 점에서 한인회가 조직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주목할 점은 뉴욕한인회의 서상복 초대회장부터 강한모, 김형린, 한영교, 이범선, 김판기 등 7대에 걸친 회장들이 모두 뉴욕한인교회 출신이었으며 1966년까지 뉴욕한인교회 내에서 총회를 개최할 정도로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그동안 양적, 질적으로 발전해 온 현재의 뉴욕한인사회의 틀을 뉴욕한인교회가 실질적으로 주도해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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