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람.사람들
▶ 코넬대학에 8만대장경 번역본 기증
지난해 10월 어느 날, 코넬대학에서는 진귀한 행사가 열렸다. 뉴저지에서 의류생산 및 도매업을 하는 코만 스포츠웨어의 조일환 사장(65)과 부인 정순자씨가 한글판 8만대장경 전집 381권을 이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기증식이 있었다.
대학의 교직원과 교수, 도서관 직원과 학생 대표들이 참석한 기증식에서 조 사장은 유창한 영어로 한국문화의 저변에 있는 불교정
신을 설명하면서 한국문화의 이해를 돕기 위해 책을 증정한다는 취지를 밝혔다. 교수들과 교직원들은 한인 사업가가 기부를 한다는데 놀랐고 한인학생들은 장사를 하는 한인 1세가 영어로 한국문화를 역설하는데 감명을 받았다.
조사장이 이 책을 기증한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다. 코넬대학의 아시아학과에서 지난해 한국학 프로그램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는데 도서관에 중국, 일본, 티벳 등에 관한 서적은 있으나 한국 서적이 없다는 말을 듣고 도서 비용으로 1만달러를 기부했다. 도서관 측은 그 돈으로 한국 책과 한국 영화를 구입하여 비치했는데
한인학생들은 물론 미국학생들의 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문화의 근본을 알려주자는 생각에서 8만대장경을 기증했다는 것이다.
한국의 국보인 8만대장경은 불교 경전을 총망라한 것으로 중국에도 없는 한국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이 8만대장경을 대만에서 ‘고려 8만대장경’이란 이름으로 한문으로 발간하여 세계 각국의 대학에 기부해 왔는데 정작 한국은 그런 생각 조차 않는 것이 안타깝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런데 동국대에서 지난 37년간에 걸친 8만대장경 한글번역사업이 끝나 지
난해 4월 처음으로 번역본이 나오자 그는 이 번역본 1질을 구입, 코넬대에 기증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조사장은 불교 집안에서 태어난 독실한 불교 신도이기도 하다. 처가도 또한 불교 집안인 그는 뉴욕 원각사의 신도이며 지난 95년 스님등 불교 인재의 양성을 목적으로 설립된 불교진흥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러니 그가 불교문화의 보급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다.
조사장은 경북 영천 출신으로 대구에서 한국사회사업대학을 나왔다. 1963년 생사 무역회사인 달성산업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으나 3년 뒤 이 회사의 부도로 회사를 그만 두게 되었다. 다행히 대학시절 학원에서 영어 강사를 했을 정도로 영어를 잘 했던 덕분에 미국의 해외경제원조기관인 유솜의 직원으로 채용되어 월남에서 근무했다. 2년 뒤 회사가 재기하자 다시 복직한 그는 60년대 말 한국에서 최초로 카셋 테입을 제작하여 미국에 수출까지 했다.
그런데 70년대 들어 미국에서 섬유 쿼타를 배정하면서 미국 바이어들이 오기 시작했는데 바이어를 접대하여 주문을 받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사장에게 뉴욕에 가서 바이어를 만나 세일즈를 하겠다고 설득, 1971년 뉴욕지사원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뉴욕 생활이란 누구나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직접 현장을 익히기 위해 의류상을 동업하기도 했고 다른 사람이 만든 셔츠를 세일즈하기도 했지만 주문을 받아 놓고도 제대로 납품시켜 주지 않는 등 애로를 겪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직접 셔츠를 만들자”는 생각이 스쳤다.
그래서 그는 1974년 친지로부터 3,000달러를 빌어 브로드웨이에 사무실을 차렸다. 원단을 사서 공장에 가져가 재단과 봉제를 하여 셔츠를 만들고 직접 세일즈를 했다. 원단 구입에서 제품 판매까지 전 과정이 그의 손을 거쳐 이루어졌다.
사업을 사면서 겪은 숱한 일 가운데는 이런 일화도 있다. 그 때는 워낙 사업 규모가 영세했던 때라 셔츠 200다즌을 만들 수 있는 물량이 그의 전재산이었는데 한번은 흰색 천을 아래와 위로 붙인 셔츠를 만들기 위해 재단한 천을 트럭에 실어놓고 점심식사를 하는 사이에 도둑이 셔츠의 윗부분을 몽땅 훔쳐 달아났다. 전재산을 들였으니 물건을 살 돈도 없거니와 똑
같은 천을 구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이제는 망했구나” 하는 절망에 빠졌을 때 번개처럼 생각이 스쳤다. “반대색을 붙이자” 그래서 위에는 검은색, 아래는 흰색의 셔츠가 나왔다. 물론 이 뉴 스타일이 크게 히트하여 조사장은 큰 돈을 벌었다고 한다.
조사장은 15년 전 맨하탄의 브로드웨이에서 뉴저지로 회사를 옮겨 올해 30년째 같은 사업, 한 회사를 계속 해 오고 있다. 한때는 10만 스퀘어피트와 3만5,000 스퀘어피트의 두 건물에서 사업을 했으나 지금은 부동산은 정리하고 리스한 건물을 쓰고 있다. 의류사업의 성패는 가격과 디자인에 달려있다는 그는 지금도 디자인실에서 디자이너들과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씨름한다.
그 뿐 아니라 제품을 만들기 위해 한국, 중국, 동남아 각국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세일즈도 나선다. 그 사이에 회사의 살림은 사업 초창기부터 그림자처럼 조씨와 함께 하면서 조력해 온 부인 정씨가 맡는다.
조씨의 기본철학은 “나는 열심히 돈을 벌지만 돈이 아닌 다른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있
다. 나는 돈으로 그 사람들의 일을 돕는다”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크고 작은 일을 도와준 사례는 부지기수이다. 모두 주위에 알려지지 않게 도운 일들이다. 80년대에 뉴욕한인봉사센터가 사무실이 없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그는 매달 1,000달러씩 6년 동안이나 봉사센터에 보냈다. 뉴욕한인회관을 건립할 때는 1만달러를 기부하여 많은 의류업자의 동참을 이끌어내
기도 했다.
그러나 시골 학교의 선생이 되는 것이 어릴 때의 꿈이었다는 그는 특히 교육 사업을 돕는데는 누구보다도 열심이다. 자신이 다녔던 국민학교를 찾아가 장학금을 전달했고 스토니브룩대학의 한국학과 설치에도 앞장 섰다. 미국에서 1남 2녀의 자녀를 기르면서 한국학교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인식했다는 그는 80년대에 뉴욕한국학교(교장 허병렬)의 이사장을 10년간 맡아 2세 교육을 도왔다.
그가 지난 79년 결혼 10주년을 위해 마련했던 여행경비 5,000달러를 부인과 의논하여 뜻있는 일에 쓰기로 하고 뉴욕한국학교 건물구입 기금으로 내놓았는데 이 일로 이 학교의 기금모금운동이 시작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는 또 퀸즈의 브라이언 고교의 한인학생들이 새로 이민온 학생들을 돕는 프로그램을 위해 재정 지원을 하고 있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그의 말처럼 그는 남을 돕는 일을 아주 당연하게 여긴다. 주위사람들로부터 들은 그의 행적을 물어봐도 “그건 별 것 아니다”고 확인 조차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으로 미국대학의 한국학 연구를 돕는 것이 소망이라고 하는 그는 우선 새해부터는 8만대장경을 대량 주문하여 미국대학에 기증하는 일을 하겠다고 계획을 털어놓았다.
<이기영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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