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의 유물, 미국의 대저택’
▶ <윤병희>
포드 자동차회사를 창업한 헨리 포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포드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근처 소도시 디어본의 그린필드라는 곳에서 1863년 7월30일 윌리암 포드와 메리 포드 사이의 자녀 6명 중 큰 아들로 태어났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다 16살 때 토마스 에디슨이 운영하는 에디슨 형광전기 회사에 취직했다. 열심히 일을 한 덕에 공장장으로까지 승진할 기회가 있었으나 자동차회사 창업을 위해 에디슨 회사를 그만두었다. 새 회사 창업시 에디슨도 투자자로서 참가해 젊은 포드를 격려하고 기쁘게 해주었다.
포드는 어려서부터 기계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다. 기계를 보면 무조건 분해하고 재조립할 정도였다. 처음본 고장난 기계도 뜯어보고 다시 고쳐놓은 천재적 소질을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정규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천부적인 엔지니어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넉넉한 성격 때문에 친구가 많았고 성정이 착해 인간 관계도 좋았다. 생전에 토마스 에디슨, 하비 파이어스
톤 타이어 회사 창업자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몇 년 전 타이어가 고속도에서 이유없이 터지는 사고가 나 문제가 될 때까지 파이어스톤 타이어를 포드회사가 계속 구입해온 것은 포드와 파이어스톤의 인연에서부터 비롯됐었다. 토마스 에디슨과는 플로리다주의 포트 마이어에서 울타리 없는 이웃으로 지냈다. 또한 다정한 선후배로 인생과 전기 이론을 논하고 사업을 의논하며 살았다.
그러나 포드는 발명을 많이 한 토마스 에디슨과는 다른 각도에서 세상을 관찰하며 살았던 것 같다. 포드는 차를 만들어 누구나 타고 다닐 수 있게 하겠다는 생각에 이르자 자연히 박리다매 정책을 택하게 됐다. 또 생산공정에 표준화를 기하여 어느 부분에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작업을 분업화해 82단계를 거치면 차 한 대가 완성되는 기막힌 생산공정을 연구 개발해냈다. 이는 당연히 생산 원가를 줄여 많은 사람이 구입해 탈 수 있게 했다.
포드는 어느날 시카고의 육류공장과 선물공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그 유명한 자동차 제작 분업화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는 이들 공장 컨베어 벨트 위에서 생산품이 다음 공정으로 운반돼 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바로 이거야. 이렇게 하면 인건비를 대폭 줄이고 속도도 빨라질거야.”그는 자신의 공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이같은 시스템을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자동차산업 뿐 아니라 모든 산업에 적용되는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종업원들의 급료도 하루 2달러50센트에서 5달러가 되고 2년만에 회사 순익이 4,000만달러에서 6,000만달러로 치솟았다.
시간이 있으면 유럽, 특히 독일로 휴가를 가서는 그곳의 기술을 보고 배웠다. 귀국해서는 미국 실정에 맞도록 적용했다. 그는 일생에 두 가지 실수를 하였다. 하나는 전국 노동조합 조직에 반대해 그들과 많은 갈등을 빚은 것과 유대인을 차별한 것이었다. 유대인 차별에 관해서는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고 그들을 위해 많은 것을 주었으나 이 오점은 역사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노조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철학이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종업원 급료를 2배 올려주는 일도 자신이 스스로 해 주었는데 왜 노조가 필요한가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혁을 막을 수는 없었던지 결국은 노조를 받아들였다.
포드자동차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차를 생산, 2년만에 1,500만대를 판매하는 실적을 올려 자동차산업의 일인자가 되었다. 그 다음 경쟁이 심해지면서 자동차의 성능도 많이 좋아져 오늘의 발전을 가져왔다. 심각한 경쟁은 기계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었다.
60년대 슬럼프에 빠졌을 때 머스탕이라는 차를 만들어 만회하였다. 초창기에는 모델 T(Model T)자처럼 생긴 차로 승리를 했고 60년대에는 머스탱, 70년대 토리노, 최근에는 토러스라는 차를 디자인해 경쟁을 하고 있다. 현재도 주식은 10달러 정도로서 많은 사람이 포드차 증권을 소유할 수 있을만큼 값이 저렴하다.
포드는 집으로 찾아오는 방문객이 많아지자 디아본시의 공터를 사들여 저택을 지었다. 건축양식은 영어 알파벳의 T자처럼(모델 티 자동차) 지어서 모델 티 저택이라 불린다.디트로이트에서 가까운 디아본시의 패어 레인에 저택을 총 건축가격 25만달러 내에서 짓도록 했다. 그러나 짓다보니 875만달러가 들었다. 자가발전에 자가 상수도시설에 약 20미터의 높이로 쌓아올린 로그강 뚝위에 집을 세웠다.
굴을 파서 본 저택과 통로가 설치되었는데 장마가 심하면 온 집안이 물난리가 나 야단법석을 빚곤 했다. 집은 3만1,770 스퀘어피트이고 방이 79개나 되며, 특히 토마스 에디슨의 방을 따로 만들어놓고 언제나 와서 자기 집처럼 지날 수 있도록 하였다.
한편 포드는 부인 클라라와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자기 집 마당과 정원을 돌면서 많은 새들의 노래 소리 듣기를 무척 즐겼다. 새에 대한 연구도 많이 하고 조류생물학에 관심이 대단해 각종 새들을 수입하여 1,300에이커의 동산에 풀어 놓았다고 한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유리창에 자기가 좋아하는 명언을 새겨 넣고 수시로 음미했다. 금언 중에 그가 좋아하던 것이 ‘장작을 패는 사람은 두 번 뜨듯하다’ ‘저금은 바보도 할 수 있으나 그것을 소비하는데는 지혜가 필요하다’였다.
포드는 여러 종류의 친구를 많이 사귀고 있었다. 생명보험 판매원과 절친하여 가끔 낚시를 같이 가곤 했다. 하루는 포드가 그 친구에게 “여보게 친구, 나는 어제 생명보험 100만달러짜리를 새로 구입했네” 친구 왈 “아니 나에게 안 하고 누구한테 했는데?” 포드 대답하길 “자네는 그렇게 중요한 것을 왜 사라고 내게 권하지 않았나?” 친구는 할 말이 없었다. 이
렇게 하여 그 친구의 마음을 일깨워 훌륭한 보험판매원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다.
엄청난 돈을 벌어 죽기 전에 현재의 미시간대학(University of Michigan)에 650만달러를 희사했는가 하면 많은 돈을 자선단체에 기부했다. 그는 비록 장수했지만 사망에 이른 것은 다소 허망했다. 어느 비오던 날, 로그강에 연결된 보일러방에 고장이 생겨 직접 고치다 감기에 걸렸다. 며칠간 심하게 앓다 숨졌다. 1947년, 84세로 일생을 마감했다.
이 시리즈는 필자 사정으로 당분간 쉰 뒤 적당한 시기에 재개할 예정입니다. 그간 이 시리즈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가는 길
디트로이트에서 서쪽으로 10마일 가면 디어본시의 미시간 애비뉴(Michigan Ave.) 위에 페어레인(FairLane Mansion)이 위치해 있다.
전화 313-593-5590
월~토요일은 오전 10시~오후 3시, 일요일은 오후 1시~3시 개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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