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도와주지 않은 죄(?)로 월 스트릿 저널에 의해 수시로 얻어맞고 있는 프랑스가 이번에는 록스타 이기 팝에게 훈장을 주었다는 이유로 또 다시 이 신문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했다. 월 스트릿 저널은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서 건수만 있으면 사설과 보수필진의 글을 통해 프랑스와 시라크 대통령을 공격하고 조롱해오고 있다.
이 신문은 지난 4월 프랑스, 독일, 벨기에 및 룩셈부르크 등이 새 유럽방위군을 창설할 의사를 표명하자 오피니언란에서 이들을 ‘4인방’이라 비난했다. 또 이라크 전쟁이 끝난 뒤에는 사설에서 프랑스가 미국과 다시 친해지려면 미국이 요구하는 대이라크 금수조치 해제에 찬성해야 될 것이라고 반협박조로 말하기도 했다.
요즘의 미국과 프랑스의 불화는 어떻게 보면 순전히 아이들의 감정싸움 같은 것이다. 역사가 긴 유럽 국가들은 역사는짧은데 힘만 커져 세계의 큰형노릇을 하려는 미국 알기를 우습게 아는 것이 사실이다. 유럽 국가 중에서도 유난히 콧대가 높은 것이 유럽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프랑스다. 유럽으로부터 미국의 영향을 제거하자고 제일 먼저 깃발을 휘두르고 나선 사람도 진짜로 코가 컸던 드골이다. 그래서 죽은 드골은 이번에 월 스트릿 저널로부터 여러 번 부관참시 됐었다.
미국 사람들은 유럽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유로트래시’라고 부른다. 영화에 관한 한 나도 ‘유로트래시’ 중 하나다. 며칠 전 월 스트릿 저널이 이기 팝과 그에게 훈장을 준 프랑스를 싸잡아 공격하면서 쓴 단어도 트래시였다.
이기 팝(56)은 ‘펑크의 조부’로 알려진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할 때 발가벗고 면도칼로 자해를 하는 등 괴이한 행동을 해 악명을 날렸었다. 프랑스 문화부가 지난 21일 그에게 예술문학 훈장을 준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바 없지만 월 스트릿 저널은 이 일을 놓고 이기 팝에 대한 인신공격과 함께 “유럽은 미국의 쓰레기 연예인들에게 명예를 주는 아첨꾼들의 동네”라고 유럽 전체를 조롱했다.
신문은 내친 김에 그동안 프랑스 문화부가 훈장을 준 록가수 루 리드, 배우 실베스터 스탤론, 재키 챈 및 제리 루이스 등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장-자크 에야공 프랑스 문화부장관이 정신나간 친구라는 식으로 헐뜯었다.
최근 프랑스 관광을 촉진하기 위해 제작된 비디오에 출연해 미국 내 반프랑스 감정 진화에 나선 영화감독 우디 앨런과 미국서 활동 시 미성년자와 섹스를 한 뒤 기소되자 프랑스로 도망간 로만 폴란스키 감독(올해 ‘피아니스트’로 오스카 감독상) 등도 별 이유 없이 힐난을 당했다. 신문은 이것으로도 성이 안 차는지 노벨상 수상작가인 앙드레 지드는 남색가였고 시인 폴 베를렌은 악성 타락자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에는 각기 그들의 이름을 딴 국립학교와 공공 수영장들이 있다고 개탄했다.
벤자민 이브리라는 사람이 쓴 글이 악의에 차 있는데 읽으면서도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쓴 사람이나 미의회 하원 구내 식당 메뉴의 프렌치 프라이즈의 이름을 프리덤 프라이즈로 바꾸라고 명령한 밥 네이 의원이나 “시라크가 미국에 와도 내 목장엔 안 데려가겠다”고 말한 부시나 모두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다. 한 북가주 거주 프랑스 사람이 뉴스위크에 쓴 대로 아예 자유의 여신상도 돌려줄 생각은 없는가. 미국의 정신연령을 보는 듯해 섬뜩하다.
나는 오래 전 ‘빛의 도시’ 파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로맨틱한 도시를 찾기 전부터 도착하면 꼭 찾아가 보리라 다짐했던 곳이 개선문 앞에 있는 카페 푸케였다. 이 카페는 반전작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운명적인 러브스토리 ‘개선문’의 두 주인공 라빅과 조앙이 자주 들렀던 곳이다. 둘은 여기서 시큼한 맛이 나는 사과주 칼바도스를 즐겨 마셨다.
‘개선문’은 2차대전 직전 독일서 파리로 도망 온 불체자 산부인과 의사 라빅과 3류 배우로 혼혈녀인 조앙의 우수와 절망과 불안에 가득 찬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두 사람의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 사랑에 감격하면서 아울러 개선문과 푸케와 칼바도스를 동경하게 됐었다. 그래서 파리를 방문했을 때 만사를 제쳐놓고 개선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푸케에 들러 칼바도스 한잔을 시켜 마셨었다(사진). 마치 라빅이라도 된 듯 이국에서 이방인이 되어 나른한 고독감에 취했던 기억이 아련하니 떠오른다 ‘개선문’(Arch of Triumph·1948)은 샤를르 봐이에와 잉그릿 버그만 주연으로 슬프고도 로맨틱한 영화로 만들어졌다. “비브 라 프랑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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