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국민회관(1368 Jefferson Bl. LA)이 오늘 30여년만에 재개관한다. 한인 이민사에서는 역사적인 일이다. 대한인국민회관은 LA는 물론 미주 전체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로, 또 해외 독립운동의 총 본부로 자리 잡았던 미주 한인이민사회의 대표적 유적지이기 때문이다.
1938년 4월17일 문을 연 대한인국민회관은 70년대 중반까지 40여년 간 조국을 떠나 모진 이민 생활에 지친 한인사회를 지켜주고 격려하며 위대한 이민 유산을 가꿔내는 기틀을 마련해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다.
중가주 리들리 초기 이민 선조들인 김호·김형순씨가 1만달러를 조성했고 한인사회가 모금한 1만 달러를 합쳐 당시로서는 거금인 총 2만 달러(지금의 150만 달러에 해당)로 1년 반에 걸쳐 건립한 커뮤니티 자산 1호 임이 틀림없다.(김호·김형순씨가 각1만 달러씩 2만 달러를 내 총 3만달러라는 주장도 있음).
이렇던 국민회관이 60년대 유학과 제2의 이민물결에 밀려 한인사회 중추 역할을 한인회에 내주고 20여년 동안 방치됐다가 이민 100년을 맞은 2003년 한국 정부의 출원금 27만달러와 커뮤니티 인사들의 후원으로 내부 수리를 마치고 역사관으로 재개관 되는 역사적인 날을 맞게 된 것이다.
국민회관은 한때 옆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에 주차장 용도로 팔려나가 사멸될 뻔한 위기도 맞았으나 1976년 당시 신한민보 발행인이었던 김운하씨의 법정 투쟁(6년여간 끌어 왔음) 끝에 재산권은 교회의 상급기관인 노회가 가지되 99년간 매각도, 내부시설 이전도 불가능하다는 항소법원의 판결이 내려지면서 간신히 보존의 길을 걷게 됐다.
최근 국민회관 복원 현장을 둘러본 도산 선생의 맏딸 수산 안씨, 막내 아들 랠프 안씨, 해롤드 선우씨, B.Y. 최씨, 민병수 변호사등 초기 이민 2세들은 어린이 학교 등이 운영되며 한인 어린이들이 놀이터 겸 만남의 장소로 이용됐다며 감회에 젖기도 했다.
랠프 안씨는 내가 11살때 건립돼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가 옮겨왔다. 농구코트가 있어 아이들이 모여 농구도 했고 어른들도 모여 여러 가지 논의도 했던 기억이 난다며 기뻐했다.
민병수 변호사도 48년 처음 왔을 때 ‘코리안 타이거스’(Korean Tigers)라는 이지역에서 유명한 농구팀이 있었는데 국민회관 옆 농구코트에서 자란 한인 청소년들의 팀이었다면서 50~60년대 유학생들의 모임 장소이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연혁
대한인국민회관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의 본부 건물이다.
1903년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도산 선생이 49명의 한인들을 모아 한인 친목회를 시작했고 2년 후 공립협회로 개칭했다. 이후 1909년 하와이의 대한인협회와 합쳐져 대한인국민회가 태동됐다. 이어 새크라멘토의 대동보국회가 가입하면서 이듬해 ‘대한인국민회 북미 총회’로 이름을 바꿔 미국 거주 한인들의 중심 단체로 확대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중국에서 항일 투쟁을 하던 도산 선생의 체포, 이승만파의 분열, 박영만 선생의 암살 등으로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공백기간이 생기자 한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단체 구성의 필요성이 역설되면서 전국 9개 단체 연합회가 모여 대한인국민회 중앙집행위원회(초대회장 김호)가 조직됐다. 이 연합회는 뉴욕의 한국학생동맹, 시카고 사회주의 연구회, 흥사단, 대한여자애국단등이 모여 미주한인사회 최초의 ‘좌·우·중도 총연합회’ 였다.
샌프란시스코 본부의 대한인국민회는 리버사이드, 옥스나드 지역으로의 농업 이주 인구가 늘어나면서 LA로 옮겨와 중가주 출신 한인들이 주축이돼 제퍼슨가에 대한인 국민회관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독립을 위한 자금을 모아 중국 임시정부에 보냈고 41년 진주만 공격후에는 미일 전쟁 총본부, 국방군 전쟁지원부등으로 항일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소송
국민회관은 철거돼 자칫 역사 속의 전설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60년대 중반까지 한인사회의 중심 단체로, 또 커뮤니티 센터로 자리 잡았던 국민회관은 이후 유입되는 유학생과 이민 물결에 밀려 그 자리를 거류민회에 내주게 된다. 이후 초기 이민자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되면서 광복절. 3·1절등 전통 행사만 치러지는 정도로 활용돼 왔다.
1976년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 임원이자 바로 옆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장로였던 C씨가 가명의 단체를 만들어 가명의 교회에 건물을 판매했다. 관련 자료는 가명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 대한인국민회 전국 대의원회에서 이의를 제기할 경우 매매가 무산되며 교회 이름을 사용하면 상급 노회의 재산으로 귀속되기 때문이라고 기록돼 있다. 교회는 가운데 버티고 서있는 국민회관을 허물어 버리고 교회 주차장을 사용하려고 했었다.
결국 대한인국민회관에 있던 기관지 신한민보의 김운하 발행인이 퇴거 소송에 맞서 1심에서 승소를 이끌었고 국민회관 복원 운동을 벌이게 된다. 이후 다시 노회가 나서 김 발행인을 상대로 항소 법원까지 갔으나 소송 7년만인 1984년 재산권은 노회에 있으나 99년간 팔지 못하고 내부 물건도 움직이지 못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대한인국민회는 건물을 팔았던 구파와 반대했던 재건파로 갈렸으며 구파는 소유물의 관리권과 교회로부터 받은 3만5,000달러의 돈을 미주 흥사단 위원부에 넘겨주고 해체를 선언했다.
그러나 신한민보가 떠난 후 건물은 관리가 안돼 훼손이 심해지고 내부 사진과 기계 등이 유실되는 등 30여년 가까운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다.
과제
대한인국민회관을 보는 시각이 관련 단체에 따라 모두 다르지만 한인사회의 유산으로 길이 보존해야 한다는 점에서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태다. 하지만 한인사회에서는 아직 보존에 필요한 기반이 마련되지 않아 관계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개관되는 국민회관을 운영하려면 관람자들을 안내하고 전시물을 관리할 최소 2명의 풀타임 직원이 있어야 하며 ▲그동안 국민회관 다락방 등에서 쏟아져 나온 자료를 보관하고 관리할 시설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얼마전 복원 공사중 다락방에서 다량으로 발견된 국민회 관련 자료 수 천점이 교회측이 밝히지 않은 모처에 보관돼 있으나 보관 방법이나 처리문제에 대해서는 교회측이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한 관계자는 보존을 위해서는 방부 처리등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면서 최근 운영권에 관한 마찰이 있지만 보존 방법부터 내놔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민회관을 커뮤니티 유적지로 지정해 가주 정부의 지원을 추진 움직임을 보였던 마크 리들리 토마스 주 하원의원 사무실의 한 관계자는 커뮤니티에서 마찰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정리가 안된 상태에서는 지원이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정부와 한국 도산기념사업회의 자금 지원으로 국민회관을 복원해온 국민회관 복원위원회는 앞으로의 운영 문제를 위한 공청회를 계획했다가 흥사단과 교회측과의 마찰이 심해지자 내년 봄으로 연기한 상태다.
신한민보의 김운하씨는 LA뿐 아니라 전 미주 한인들의 정신적 지주라면서 운영권보다는 보존을 위한 한인사회의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정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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