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 C와 포도주를 곁들인 저녁을 먹으면서 우리들의 얘기는 늘 그러하듯이 음악으로 돌아갔다. 바그너의 악극 ‘링’ 사이클의 열렬한 팬인 친구는 이달 하순부터 독일 바덴 바덴에서 시작되는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지휘하는 세인트 피터스버그의 마린스키 오페라의 ‘링’ 사이클 공연에 관해 얘기했다.
바그너 얘기만 나오면 열변을 토하는 그의 말을 경청하던 나는 몇 년 전 예루살렘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주해 큰 소동을 일으킨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의 얘기를 꺼냈다. 내가 바렌보임을 거론한 까닭은 지난 9일 오렌지카운티 공연센터서 그가 지휘한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벅찬 감동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이날 바렌보임은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자신이 상임지휘자로 있는 베를린 슈타츠카펠레(1570년에 창설된 이 오케스트라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전속 악단이다)를 지휘, 슈만과 베토벤의 곡을 연주했다. LA타임스의 음악평론가 마크 스웨드도 말했듯이 바렌보임의 지휘는 전투하는 식이었는데 경련을 일으키듯 온 몸을 떨며 악단을 이끌어갔다. 장내를 한치의 빈 공간도 남기지 않고 소리로 가득 채우는 연주였다.
나는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을 지난해 12월 21일에도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감상했었다. 이 날의 지휘자는 로열 오페라의 상임지휘자 안토니오 파파노. 그의 대담하고 확신에 찬 지휘 하에 LA필은 ‘운명’의 반복되는 노크를 강렬하게 연주했다. 소리에 의해 정신이 구타당하는 기분이었다.
‘운명’교향곡의 시작을 알리는 ‘타 타 타 타’하는 4개의 음은 이제 거의 문화적 상투어가 되다시피 했다. 4개의 음과 이어지는 선율은 디스코 음악으로도 편곡이 되었을 정도다. 친구는 버나드 쇼가 이 음악을 듣고 ‘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했다고 알려줬는데 나는 이 곡을 들을 때면 베토벤이 자신의 모진 운명과 머리를 맞대고 다투는 모습을 연상하곤 한다.
베토벤은 청각상실 때문에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지만 예술 때문에 이를 포기했다. 베토벤의 어록을 보면 그는 절망과 희망과 체념의 사이클을 수 없이 오르락 내리락 한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운명과 맞붙어 싸울 것이다. 운명은 결코 나를 짓누를 수 없을 것이다. 오, 삶을 일천번 산다는 것은 아름답구나”하고 의기양양하다가도 “나는 운명의 선고를 수락하겠다. 체념만이 남았다”고 절망했다.
베토벤의 음악이 우리에게 격한 감동을 주는 까닭은 이런 절망 속에서 영혼이 탈출해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죽음을 끝없는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라면서 “오고플 때 오라. 용감히 널 받아들이마”라고 자신의 영혼의 무한한 자유로움을 자랑했다. 그의 삶의 근본 원칙은 이런 자유로움인데 베토벤의 음악을 들을 때면 진정 자유로워짐을 느끼게 된다.
베토벤의 절망을 극복한 승리와 슬픔을 겪어낸 기쁨은 ‘운명’과 ‘합창’교향곡의 폭발적 피날레에서 분명하고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감정이 조작 당하는 느낌까지 갖게 되는데 음의 소용돌이와 혼미 속에 가라앉으면서 온몸의 핏줄이 일어서고 심장의 박동이 과속해 터질 것 같다.
인류의 형제애와 우주를 찬양한 ‘합창’교향곡은 베토벤의 의도와 상관없이 정치 및 사회적 이념을 위해 과용돼 온 음악이다. 베토벤의 천재성의 가장 위대한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교향곡이 베토벤의 지휘로 초연됐을 때 베토벤은 완전한 귀머거리였다. 당시 한 연주자는 베토벤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어댔다고 말했는데 음을 들을 수 없어 연주와 상관없이 자기 마음대로 지휘했던 것 같다.
지난 11일 디즈니 콘서트 홀을 다시 찾아 주빈 메이타의 지휘로 LA필이 연주하는 ‘합창’교향곡을 감상했다. LA필과 커뮤니티와의 만남의 한 수단으로 이날 노래한 4개의 커뮤니티 합창단 중에는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소리합창단이 포함됐다. 순전한 기쁨을 맛보았다.
나는 요즘 지난 연말 아들이 생일선물로 사준 베토벤의 9개 교향곡 전집(EIM 출시)을 듣고 있다. 사이몬 래틀이 비엔나 필을 지휘한 음반으로 비평가들로부터 역대 베토벤 교향곡 전집 중 가장 훌륭한 연주라는 평을 받았다. 압도적으로 아름답다.
베토벤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연말 연초에 그의 음의 숲속에서 삼림욕을 하면서 나도 어느 새 인간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박흥진<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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