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들의 벗…젊은 독자 눈높이를”
초창기엔 ‘한국’이라는 신문제호만 봐도 눈물이…
이민자들 미정착 돕고 주류사회 진출에 가교역할을
기사 내용등 선별 마음놓고 접할 수 있는 신문되길
본보가 창간되었던 1969년은 본격적인 한인타운이 조성되지도 못한 시기였다. 단지 올림픽가에 위치한 한인마켓이나 한인식당 한 두개가 인근각처에 흩어진 채 한국식품 및 음식과 한국 소식, 또 한인 동정에 목말라 하던 한인들을 올림픽가로 점차 모여들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태동된 한국일보의 창간소식은 가뭄에 만난 단물이나 망망대해 같은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격이었다고 당시의 한인들은 회고하고 있다.
본국 신문을 비행기로 실어 날라 현지에서 복사, 각 가정에 우편으로 배달되게 한 현재로 따지면 극히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남가주 지역 한인들은 ‘한국’이라는 신문 제호만으로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열광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이민한 한인 독자들은 당시의 한인들과는 다른 컨셉으로 한인신문 미주지역 태동 35주년의 의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창간 당시의 소식에 목말랐던 한인들과는 달리 활자화된 신문뿐 아니라 방송, 인터넷까지의 신속한 뉴스 및 심도 깊은 정보전달 매체를 홍수같이 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국에서 대하던 신문과는 뭔가 다른 것을 기대한다. 한인사회 중심의 뉴스나 정보도 좋지만 미주류사회로 한인들이 깊숙이 진출하는데 가교역할을 해주기를 원한다. 그와 함께 1세와 1.5세, 그리고 2세들과의 벌어져 가는 간격을 언론매체들이 메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다.
1969년에 미국으로 이민한 뒤 몇달 후 창간된 본보를 구독하기 시작해서 현재까지 35년 동안 꾸준히 구독해온 창간독자 최철(75·웨스턴 인 대표)씨와 2001년 7월 LA로 이민하여 본보 독자가 된 정종원 목사(40·동양선교교회 부목사)가 모처럼 한자리에서 만났다.
고참과 신참 독자인 이들의 대화를 통해서 본 한국일보 35년을 진단하고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들어본다.
▲최철-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최근 이민하셨다니 본국뉴스나 미국소식, 미국내 동포사회에 대한 갈증은 없으셨겠습니다. 저는 한국일보가 창간된 그 해 이민 와서 몇 달간을 암흑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었지요. 그래서 요새 이민자들을 보면 참 좋겠다는 생각까지 해요. 그로 인해서 이민생활 정착속도가 우리 때보다 훨씬 빠르겠다는 부러움도 갖고 있어요.
▲정종원 목사-저는 미리 이민을 준비했던 것이 아니고 갑자기 교회의 부름을 받아 왔기 때문에 한인 이민사회에 대한 상식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본국신문은 물론 현지 제작판도 한국 유명 일간지들보다 더 두툼하게 나와 아침마다 배포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수퍼마켓에 처음 장보러 갔다가 한국이라는 신문 제호가 박힌 신문이 얼마나 반갑고 자랑스럽던지 그 자리에서 구독을 신청했죠. 외국에 나오니 한국이란 이름이 정말 다른 의미로 다가오더군요. 매일 아침마다 따끈한 소식을 담고 집 앞까지 배달되는 신문이 미국정착을 돕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가족과 내 땅을 떠난 향수를 다스리는데도 한몫하고 있다고 봅니다. 감사하죠.
▲최철-당시 저는 한인은 구경도 할 수 없는 호손 지역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해서 한국인만 봐도 반가웠는데 한국신문이 나온다니 얼마나 좋았는지요. 처음 1년 정도는 본국신문이 비행기로 와서 이곳에서 광고를 붙여서 우편으로 배달되니 지금과 비교하면 구문도 한창 구문을 받아 본 거죠. 그런데도 처음부터 끝까지 잡아먹을 듯 정독하며 울고 웃고 했지요. 광고면까지 다 읽은 후에도 버리지 못하고 쌓아 두는 거예요. 여기 저기 흩어져 살던 한인들이 올림픽을 중심으로 모여든 게 그때부턴가 싶습니다. 결국 한인 커뮤니티 태동을 시킨 셈이지요.
▲정종원-그런 말씀을 들으니 제가 신문을 너무 쉽게 대하고 비판적으로 봤던 사실이 죄송스럽네요. 저는 6남매중 외아들로 연로한 아버님과 아픈 장인을 남겨두고 미국에 왔기 때문에 마음이 한국 땅에 더 치우쳐 있어서 신문을 봐도 본국소식만 보게 되더라구요. 그렇지만 점차 현지뉴스에 더 눈이 가고 섹션별 기사내용, 광고면도 우리의 미국이민 뿌리내리기에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최철-그렇죠. 한인사회와 한인여론을 파악하고 한데 모으고 성장을 돕는데 신문매체가 없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 기억으로는 한국일보의 중요성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인상깊게 각인된 것은 이철수 사건이었어요. 불우한 한인청년 이철수가 억울한 살인자 누명을 썼던 것을 현재 한국에서 국회의원으로 활약중인 유재건 변호사와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의 한인기자 이경원씨가 구명에 뛰어든 것이었지요. 결국 그에는 남가주 한인들은 물론 미주 전체 한인사회가 합심이 되었는데 한국일보라는 매스컴이 핵심 역할을 했거든요. 그 이후에도 미국 속에서의 한인문화를 펴내고 우리언어 지키는데 얼마나 지대한 공헌을 해왔는데요.
▲정종원-저도 본국지보다 이곳서 제작되는 신문량이 많은 것을 이제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인사회 규모가 아직 작아선지 내 주변의 사람들이나 보통사람들이 자주 기사화 되고 보이고 그것이 아주 친근해지는 요소더군요. 그러나 신문 내용이 한인 1세들의 정서에는 맞는 대신 청년층 구독자가 많지 않은 것이 아쉬운 면으로 남아요. 걱정도 되구요. 실제 제 주변에서도 한국어나 문화에 익숙한 젊은층들조차 거의 신문을 안 보더군요.
▲최철-저는 아직도 신문보기에 매일 두시간 이상 투자합니다. 바빠서 못 봤으면 잠시간까지 줄여서라도 보게 되요. 저는 아무래도 비즈니스를 하니까 경제면은 어느 것 하나도 빼지 않고 중요한 것은 스크랩하는 버릇은 수십년 되어도 안 없어지네요. 특히 경제면은 35년 전에는 자그만 모래알 같았던 한인경제 규모가 이제는 그 대단한 명성을 자랑하던 윌셔가의 빌딩들을 수십개나 차지해온 역사의 기록이라고 봅니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수년 전까지 발행되던 영문판이 중단되어 한국어에 서툰 한인 2세들이 한국신문이나 언론에 접해 볼 기회조차 차단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들까지도 끌어 안아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정종원-저도 그런 면이 우려됩니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1세 위주의 신문은 현재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1.5세나 2세들은 관심이 없는 것 같아서요. 또 걱정이 되는 것은 너무 저질적이거나 낯뜨거운 퇴폐적인 내용과 사진 등이 버젓이 게재된 주간지 등이 함께 집으로 배달되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유명 신학자인 칼바르트의 “한 손에 신문을, 한 손에는 성경을 들어라”는 말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제가 마음놓고 읽을 수 있는 신문발행에 계속 힘써 달라는 당부를 마지막으로 드리겠습니다.
▲최철-저의 욕심도 이렇게 대단한 신문을 우리의 젊은이들에게도 접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각 교회에나 주말 한국학교에선 어린이나 청년들의 교재로 이를 이용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렇게 함께 얘기할 수 있어서 즐거웠습니다.
▲정종원-이민 선배들의 체험과 외국 땅에 처음 내려진 신문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철
(75세·1969년 이민 창간독자)
▲정종원
(40세·2001년 7월 이민독자)
▲정리: 이정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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