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태(시인)
전라북도 진안군의 말 없는 저 산들, 산등성이의 고갯길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하늘이 얼마나 먼지 짐작도 못하면서 건방지게 하늘을 향하여 간다. 미련하다. 산이 많은 한국의 고갯길이 다 그렇게 미련하다. 나는 그런 길이 좋았다.
날아가는 화살촉의 직선의 길같이 약삭빨라야 살 수 있다는 현대, 따스한 인성 마저 가물가물 사라져가는 세상길에서, 가다가 돌아보면 금방 사라진 진안의 그 미련한 시골길, 내가 살아온 길처럼, 돌아가서 처음을 다시 보고 싶었다.
잎새가 다 떨어진 허전한 나무에 가을빛 입에 물고 주름살을 펴고 있는 노오란 감들이 졸고 있을 때, 코스모스 눈동자에는 피가 고인다.
코스모스는 한국의 농민과 그 얼굴이 같다. 길가 양 옆이나 쓰러지지 않는 빈 들에 지천으로 피어있는 코스모스. 미국땅에서는 코스모스가 보기 힘든다. 먹을 것이 많으면 코스모스는 살지 않기 때문이다.
코스모스는 척박한 땅에서 피어나는 서정이다. 산 밑에 황토들이 조금씩 쌓이면 코스모스 씨앗은 쓰러져 엎디어 척박한 땅을 화려하게 덮겠다고 창백한 입술에 이슬을 적시며 소근거린다. 그러면서도 자라다가 지치면 황량히 불어가는 바람 한 점 여윈 벼게로 안고 긴 목을
좌우로 흔든다. 눕고 싶은 거겠지.
마이산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은 표정이 둘이다. 표정이 있는 사람들은 관광버스를 타고 온 도회지 사람들이고 표정이 없는 사람들은 그 동네 사람들이거나 코스모스 꽃이다. 보기 힘든 그 무표정이 내 발목을 잡아당긴다. 가라앉은 얼굴, 무거운 수심, 그런데도 눈빛에는 흥분이 날라다닌다. 살기 위해서일까? 짐이 되는 식솔들이 오히려 기뻐서일까?
나는 그 때 아무도 모르는 헌 것을 배우면서 기쁨을 느낀다.
한 번도 지나간 적이 없는 이 길이 많이 살아본 인생길처럼 다정스럽다. 해가 지고 또 저도 이 길은 이대로 영원히 뻗쳐 있었으면 좋겠다. 한국의 국민정서는 도시의 유행성 정서가 아니다. 두껍게 배여있는 농민의 정서가 한국의 정서이다. 뭐가 몸에 좋다 하면 먹는 약도 유
행이고, 숯가마 찜질이 좋다하면 강원도 산골 화전민의 숯가마까지 찾아가는 그런 유행성, 품질과 용도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유행으로 번지는 명품 사기, 농촌사람들의 흙과 같은 두터운 마음을 시리게 한다.
해마다 피땀흘려 짓는 농사지만 돌아오는 대가는 한숨과 비례하면 딱 된다. 농산물 중간상인들이 부자가 되는 대신 농부는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도시로 어렵게 유학을 간 아이의 희망은 풀이 죽어 머리를 숙인다.
길은 선이고 질서이다. 하나의 사회에서는 더불어 같이 살아야 한다는 생존법칙이 사람 사는 길이다. 사회가 제대로 굴러가려면 지켜야 할 선이 있고 길이 있다. 생각에도 길이 있고 마음에도 길이 있다. 열매가 익는 데에도 질서가 있고 사랑이 익는데에도 질서가 있다. 길과 질서를 알면 삶에 공존이 있다. 인간이 영장으로 불리워지는 것은 질서를 알고 길이 있기 때문이다.
관광 온 먼 곳의 스님이 휴대전화를 귀에 달고 다니니, 서울에서 왔다는 수녀도 휴대전화를 귀에 달고 다닌다. 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보이는 저 행위, 혼동인 것이다.
도시와 시골은 거리로는 가까운데 왜 그렇게 멀어 보이나? 도시 사람 시골 사람 너무 먼 사람, 서로서로 먼 지점을 떠나서 점점 가까워지는 간격, 그것이 이웃이고 사회이고 나라가 되는 것이다. 장사야 시원치 않으면 문을 닫아버리면 그만이겠지만 농사일은 문을 닫지 않는다.
국민의 일인당 빚이 5,000만원이 넘는 한국경제에서 나라를 지켜가는 밑힘이 그래도 농부들이라는 것을 코스모스는 여윈 모가지를 가까스로 흔들며 끄덕이고 있다. 척박하지 않으면 피어나지 않는 코스모스들, 왜 코스모스가 한국에 유독히 많은가를 마이산 가는 진안군 시
골길에서 환하게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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