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에 다섯 번째로 부임한 이채연 서리공사의 아내가 기록상 미국에서 최초로 세례받은 한인이었습니다. 워싱턴 한인사는 곧 미주 한인사의 시조라고 하는데 기독교계의 중요한 유산이 될 수 있는 신앙 선조들의 역사도 참 많다는 사실을 알게됐습니다.”
미주 이민 역사가 100년이 훌쩍 넘어버린 한인사회. 지난해 기념행사를 성대히 치렀고 한인사 개정 발간 작업도 한창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관심과 열정을 자산으로 미주 한인교회사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한 목회자의 역사기행이 관심을 끌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후랭코니아 로드 선상에 위치한 버지니아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손상웅 목사가 신앙의 뿌리를 찾아나선 것은 3년 전. 한인 이민 100주년을 앞두고 미주 한인사회가 기념행사 준비에 한창일 때였다. 목회자의 신분으로서 “그렇다면 미주 한인들의 믿음의 뿌리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월요일만 되면 워싱턴 일원의 오래된 교회나 도서관, 대학, 한인 관련 유적지들을 찾아나섰다. 물론 체계적인 연구는 아니었지만 워싱턴 포스트 등 지역 언론과 서적에 나타나는 한인 관련 자료들이 중요한 단서가 됐다.
그리고 뜻밖의 기록들이 발견되기 시작했다.
▲최초의 미주 한인 세례교인
1882년 5월22일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듬해인 1983년 9월2일 민영익을 전권사절로 한 첫 보빙사절단이 샌프란시스코를 밟는다.
그러나 조미수호 통상조약이 맺어진지 6년이 지난 1888년 1월에야 박정양 공사가 첫 부임을 하게 되고 이후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 체결로 조선공사관이 폐쇄될 때까지 18년간 5명의 공사와 8명의 서리공사가 외교활동을 벌였다.
5대 공사였던 이채연 서리공사 부인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미국 기록에는 ‘Mrs. 이채연’으로 나타날 뿐이다. 실제 성은 배씨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한성판윤까지 지냈던 이채연이 미국에 있던 1889년 4월 부활절 때 아내와 DC에 소재한 ‘언약교회’에 처음 출석한다.
워싱턴 포스트 4월22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복을 입은 이 부부는 미국인들의 ‘대인기’였다. 세례는 1892년 7월 로녹 인근 살렘에 소재한 살렘장로교회에서 받았는데 당시 교회기록이 아직 남아있다. 이후 배씨는 미국 남장로교단이 1호 선교사 6명을 한국으로 파송할 때 샌프란시코까지 따라가며 도움을 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선교사들 중 한국에 와 5년 만에 사망한 리니 데이비스는 생전에 “Mrs. Lee가 선교활동을 도왔다”라고 밝혔는데 그가 배씨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조선에 남편과 함께 돌아와 독립협회에도 가입하는 등 열심히 애국 운동을 했던 배씨는 세례받은 사실은 정치적인 이유로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
▲언약교회
이채연 서리공사 부부가 출석했던 언약교회(Church of the Covenant)는 북서 18가와 N 스트리트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National Presbyterian Church’와 합쳐지면서 1966년 건물도 없어졌지만 이 교회는 당시 한국 외교관들의 흔적이 다수 남아있는 곳이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1904년 4월2일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고 서재필이 여기서 미국 철도우편국 초대국장이었던 죠지 암스트롱의 영애와 결혼했다. 이범진 9대 공사 부부도 이교회에 출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12월25일자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마지막 공사였던 김윤정 공사가 아들 용주, 딸 광희와 함께 역시 이교회를 다녔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용주는 “아버지처럼 외교관이 되는게 꿈”이라고 인터뷰에서 밝히고 있다.
▲신앙생활은 외교의 연장
손 목사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한인 외교관들이 출석하던 교회는 언약교회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화여전 최초의 한인 여교수였던 하란사가 1899년 4월9일 ‘Hamlin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등록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다음날 기사에서 보도하고 있고 동지는 1902년 8월9일자에 독일인 교회인 조지타운 루터란교회에 누군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인이 최초로 등록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후 1910-20년대 부터는 교회 관련 한인 기록이 미국 신문이나 문서에 부쩍 많이 나타나는데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이 출석하고 한치유씨가 세례를 받은 은혜개혁교회, 서재필 박사가 강연한 ‘마운트 버넌 플레이스 메소디스트 이피스코펄 쳐치’와 ‘뉴욕 애비뉴 장로교회’ 등에 한인 기록이 남아있다.
손 목사는 “당시 외교관 신분이었던 이들은 정치적인 이유로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며 간접적으로 조국 광복을 위해 힘썼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워싱턴 지역 최초의 한인교회는?
공식적으로 워싱턴 지역 최초의 한인교회인 ‘와싱톤한인교회’는 1951년에 세워졌다. 그러나 손 목사는 그 이전에 서너 개 이상의 교회 형태의 모임이 한인들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근거는 몇 가지가 있다. 우선 뉴욕한인교회의 51년 이전 기록에 ‘DC 한인교회들’ 이름으로 건축헌금을 모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서부 지역에서 장로가 된 후 30-40년대에 DC로 이주해 온 이원순은 가족들이 많았는데 교회 지도자의 신분으로 교회를 세웠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또 30년대에 아메리칸 대학에서 공부하던 10여명의 유학생들도 크리스천 이어서 주말이면 모여서 예배를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신앙운동을 애국운동으로
연대 철학과와 장로회 신학대학을 졸업한 손 목사는 1982년에 도미했다. 풀러신학대학원에서는 선교 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딸만큼 기록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다.
나성영락교회와 토란스제일장로교회에서 부목사로 있다 3년전인 2002년 버지니아장로교회에 담임으로 부임했다.
손 목사가 발로 뛰는 역사 탐구를 계속하면서 아쉬운 일도 많았다. 한인들이 스스로 남긴 기록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의회도서관에 한인 관련 워싱턴 포스트 기사들이 잘 정리돼 큰 도움이 됐다.
손 목사는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불안하게 공부하던 선각자들이 정신적인 안정을 위해 기독교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됐고 교회는 초기 한인사의 중심에 서게 된 것 같다”며 “미주 한인들의 신앙 운동은 곧 애국운동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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