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 모처럼 10여 일간 사랑하는 어머님, 모국, 그리고 꿈속에도 잊을 수 없는 정겨운 고향(전북 고창)을 방문할 기회를 가져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금년 겨울은 한국, 특히 나의 고향인 호남지역에 80년이래 최고로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내가 고향을 찾아갔을 때도 눈이 멎은 지가 이미 10여 일이 지났다고 하는데도 겨우 대로에만 자동차가 다닐 수 있을 뿐 주위에는 온통 하얀 눈으로 여전히 덮여 있었다. 특히 몇몇 친구들과 함께 그리웠던 선운사를 만나러 갔을 때는 눈이 전혀 녹지 않고 덮여 그 주위가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신선세계에 온 것처럼 착각할 정도였다.
선운사의 대웅전, 도솔암을 거쳐 낙조대를 오를 때까지 줄곧 새봄을 준비하며 눈밭에서 추위를 의연하게 버티고 있는 ‘장송(長松)’이라든가, 대나무 숲, 그리고 앙상한 매화나무들이 예나 다름없이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선조들은 이들을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일컬어 늘 푸른 소나무는 ‘불변’을, 곧고 꼿꼿한 대나무는 ‘절개’를, 혹한을 이겨내고 꽃샘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매화는 꽃을 피워 ‘청향(淸香)’을 제공해 예로부터 뭇 사람들이 이들을 노래하며 사랑해 왔다.
그러나 이런 겨울의 눈을 볼 때마다 유독 생각나는 것이 추사선생의 ‘세한도’이다. 추사의 ‘세한도’는 보통사람들에겐 그저 황량한 설야에 쓸쓸하게 서있는 소나무와 잣나무의 정경을 그린 산수화일 뿐으로 생각될지 모르지만 차가움과 적막 가운데 고고한 상록수의 풍모를 그린 추사 선생의 ‘세한도’는 단지 그림이기 이전에 그의 제주도의 귀양살이 때의 모든 심경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추사의 마음이기도 하다. 그가 ‘세한도’를 그린 취지는 그의 발문(跋文)에서도 잘 나타나 있듯이 추사가 처음 제주도로 귀양온 첫해에는 많은 그의 친구나 지기들이 찾아와 위로를 하고 그들의 우정을 추사에게 보였었으나 그후 추사의 복직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그 많았던 친구나 지기들의 발길이 뚝 끊기고 찾아오지 않았으나 유독 추사의 제자 ‘이상적(李尙迪)’ 만은 변함없이 스승인 자기에게 계속 경의를 표하고 많은 정보나 특히 중국에서 발행한 ‘대운산방문고통례‘, ‘황조경세문관’ 등 많은 귀한 책들을 보내준 그의 두터운 정에 감복하여 추사가 그를 위해 그려준 것이다. 공자는 ‘추운 겨울철이 된 연후라야 비로소 송백(松柏)의 진가인 푸르름을 볼 수도 있고 알 수 있다’ 하였으니 잘 살 때나 궁할 때나 변함없는 그대의 정(情)이야 말로 ‘세한 송백’의 절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라고 자신의 처절한 심경과 제자의 정에 대한 고마움을 적고 있다.
이 ‘세한도’는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였으며 추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후지(藤塚)교수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2차대전 말기에 서예가인 소전 손재향 선생의 정성과 노력으로 우리 조국의 품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1944년 종전을 한해 앞둔 동경은 연일 공습으로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소전은 폭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후지 교수 집 근처에 아예 여관을 얻어 진을 치고 고령으로 병석에 드러누운 후지 교수에게 매일 조석으로 극진히 문안 인사를 갔다. 이렇게 하기 90일째 되던 날에야 후지 교수는 비로소 소전의 속셈을 헤아리고 그의 큰아들을 불러 “내가 죽거든 조선의 손재향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말고 ‘세한도’를 돌려보내라”고 명했다. 유언이나 다름없는 이 말을 듣고도 소전은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열흘 동안이나 더 계속 그에게 문안 인사를 갔다. 100일째 되는 날 후지 교수는 ‘전화(戰禍)속에서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자기를 찾아온 소전의 성심을 저버릴 수 없어 선비 체면으로 그냥 주는 것이니 부디 잘 모셔가라’ 라면서 ‘세한도’를 소전에게 건네주었다 한다.
추사의 ‘세한도’는 우리에게 단순한 그림이 아니라 사제지간의 변함없는 두터운 정과 공자가 말한 절조(節操), 그리고 소전의 우리 문화재 사랑의 마음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진 진정한 값진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김영식 /볼티모어,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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