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2년 망명 ...北추적 피해 마피아 피살설도 유포
전 평양사범대(김형직 사범대) 교수이며 예일대 초빙교수로 있는 김현식 교수는 요즘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평양-워싱턴’의 제목에 ‘평양 출신 노교수가 걸어온 70여생 길을 더듬어’라는 부제가 붙었다.
일본 사람 밑에서 13년, 김일성 통치하에서 28년, 김정일의 손아래서 17년, 러시아에서 4년, 서울에서 9년, 미국에서 4년. 그는 “생애의 마지막 시기에 뒤돌아 보니 지금에 와서야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 잘되고 못된 것, 진실과 허위, 정의와 부정의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것들을 빠짐없이 적어 보려고 소매를 걷어 올렸다.
현재 부인과 함께 단둘이서 거주하고 있는 훼어팩스의 김 교수 댁을 찾았다. 불편한 몸에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김 교수는 옛 일을 떠올리며 가끔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다.
- 1992년 망명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지요.
▲ 러시아에서 교수로 있을 때입니다. 재미교포이던 누님이 안기부 요원과 함께 찾아왔어요. 42년 만에 만난 것입니다. 누님은 “어머니는 네가 목사가 되기를 원하셨는데 이렇게 살아서야 되겠느냐. 망명하자”고 강력히 권유하셨습니다. 그러나 할 수가 없었지요. 북한에 있는 가족과 나를 위해 보증을 선 사람들은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제자들이 모두 보증 섰어요. 안된다고 했지요. 그런데 누님이 돌아간 후 바로 “내일 평양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어요. 누님이 묵었던 조선족 집이 이중 간첩이었던 겁니다. 밤새 고민하다 들어가도 잡혀 죽는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미국에 와서는 6개월간 어느 교포 집 2층에서 숨어 살았습니다. 3명의 마피아 단원에게 돈을 주고 “어디서 때려 죽였다”는 소문을 냈습니다. 묘지도 만들었구요. 제가 망명하는 바람에 해군대학 교수, 그의 딸, 평양의학대학 약사, 고등학교 교사, 화가 등 많은 사람들이 총살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생활하셨습니까?
▲안기부에서 석 달 동안 있다 풀려났습니다.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하더라구요. 조사를 받는 중에 2주간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누님에게는 알릴 필요가 있겠다 싶어 유서를 썼습니다. 어떻게 이 유서를 전할까 생각하다가 러시아에서 통역으로 도와줬던 여성이 생각나더군요. 그 때 남북한 합동 민속 축제가 열렸는데 한복 전시회를 담당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여성이 현재의 부인 김현자씨다. 청담동 한복집에서 디자이너로 일했던 부인은 훼어팩스 자택 안의 응접실을 꾸며 자그마한 한복집을 차렸다)
그후 성결대학 러시아어과, 국가정보원 등에서 강의하다 1997년 뇌출혈로 쓰러졌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되찾은 것은 1998년 천안대 명예총장이던 최순직 목사를 만나면서 였지요. 그는 한국전이 일어나기 전 평양신학교 학생이었는데 당시 유년 주일학교에서 나의 담당교사였어요.
1997년 2월 이한영씨가 피살된 후 다음 차례가 저라고 생각했는데 쓰러지면서 오히려 죽음을 면하게 된 셈입니다. 병원에서는 오래 식물인간으로 있기도 했습니다.
- 북한 사람들을 위한 영어 성경 교재를 쓴 게 동기가 돼 미국에 오셨다지요.
▲ 2000년 남침례교 선교부에서 성경 이야기 책을 만들 때 협력을 했고 뉴올리언스 신학대학원에서 북한에 보내기 위해 출판한 ‘남과 북이 함께 읽는 성경 이야기’라는 제목의 영어 성경도 썼어요. 북한에서 영어 교재로 쓴다고 하더군요. 이 교재를 보고 예일신학대학에서 강의해 달라고 초청해 2003년부터 출강하고 있는데 계약을 두 번 더 연장했고 영주권 수속도 밟고 있습니다. 조지 메이슨대 종교학과에서 북한의 문화 교육, 종교에 대한 강의를 올 가을부터 할 예정입니다.
- 북한 얘기로 돌아가겠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대북정책을 어떻게 보십니까?
▲ 한마디로 두 나라가 북한을 너무 몰라요. 황장엽씨에게 왜 서울에 왔느냐고 물으니 “가만 있으면 서울이 북에 망한다, 불바다가 된다” 그러더군요. 전쟁을 막고 북한의 개방개혁을 앞당기자는 생각으로 망명을 결심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이들은 황장엽씨를 ‘간첩’으로 몰았습니다. 그는 김일성을 속까지 아는 사람입니다. ‘민족공조’는 고사하고 미군이 빠지면 하루 아침에 남침을 당할 겁니다.
황씨가 저보고 “서쪽 초소를 지켜라” 그래요. 미국에 북의 속셈을 제대로 알리라는 말입니다. 저도 생각을 바꿨습니다. 북의 실상을 알리는데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주체사상이라는 거, 국내용과 대외용으로 나눠집니다. 국내용은 수령이 기본이고 대외용은 인민대중이 기본인 것처럼 합니다. 속이기 위한 것이지요.
얼마나 북한이 잘 속이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러시아에 있을 때 KGB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고급 호텔에서 별난 강습을 다 받았습니다. 그랬더니 모스크바 시장이 저보고 망명하라는 거예요.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대로 되더라구요.
- 북한을 많이 지원하는 한국 교계는 어떤가요?
▲ 북한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봉수교회, 칠곡교회 모두 외국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것입니다. 죽어도 절대 신자가 될 수 없는 사람만 데려다 놓지요. 300명 신도에 60명이 대기자 명단에 올라 있습니다. 북한에서 성경책도 찍어내지만 외화벌이용이지요. 교회 금고에 넣어놓아 마음대로 볼 수 없습니다. 연보는 토요일에 모두 나눠줍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행사장입니다.
-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떻든가요?
▲ 평양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인 88년의 일입니다. 제 생일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교수는 한 달에 20곽의 담배를 배급받았는데 아내가 한 달 전부터 매일 몰래 농민 시장에 가 팔아 계란을 하나씩 사서 모았습니다. 생일은 김일성, 김정일 외에는 아무도 차려 먹지 못합니다. 가족들이 모였는데 아들은 배급쌀을 조금씩 절약해서 송편을 만들어 왔고 딸은 강냉이밥 등 먹을 것을 싸왔어요. 계란을 몇 등분해서 나눠먹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때 김교수는 가족들과 비참하던 당시 생각이 났는지 울음을 터뜨리더니 한동안 멈추질 못했다. 김 교수는 해외동포원호위원회를 통해 입국하는 한인들은 최고의 대접을 해주기 때문에 북의 실상을 전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 앞으로 대북 관계를 어떻게 이끌어 가야 할까요?
▲ 어떻게 해서든 많은 주민을 밖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자꾸 들어가 주기만 하면 문을 더 닫게 만드는 꼴이 됩니다. ‘세상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황장엽씨가 왜 망명을 했겠습니까? 이제는 외교관들의 탈출도 적지 않습니다. 도와주더라도 북정권 유지와는 상관없는 의학이나 농업, 영어 등에 국한돼야 합니다. 북쪽에 공장을 세우는 것도 위험합니다. 구실을 내세워 쫓아낼테니까요. 개성공단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김 교수는 “몸은 불편하지만 세시간은 끄떡없이 얘기할 수 있다”며 북을 알리는 일에 남은 여생을 바치겠다는 뜻을 밝혔다.
김 교수의 ‘평양-워싱턴’은 다음달에 출판될 예정이다.
=====■김현식 교수는
1932년 함경남도 부전 호반의 작은 마을에서 3남3녀의 다섯째로 태어났다. 14세 교회 집사였던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 어머니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해 목사가 되라”는 유언을 남겼다.
18세때 고급 중학교 학생으로서 인민군 병사가 되어 한국전에 참가, 머리와 팔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상인군인으로 제대한 그는 평양 사범대학 노어노문학과에 입학,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 후 동대학 교수로 임명됐다. 1971년부터는 김일성 처가 자녀들의 개인교사로 일했다. 1988년부터 러시아 국립사대 교환교수로 있던 그는 1991년 한국 정보부가 한국전 당시 함흥에서 피난, 월남하였다가 시카고로 이민간 누님을 42년만에 만나게 해주면서 망명을 결심해 이듬해인 1992년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이병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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