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에 오자마자 처음 찾아 간 곳 중의 하나가 웨스트할리웃의 선셋 불러바드에 있는 타워 레코드였다. 그 때만해도 LP를 팔 때였는데 그 뒤로 얼마 안있어 CD가 나와 둘이 함께 진열대에서 공생하더니 마침내 CD가 진열대를 독차지 해버렸다. 나도 이 추세에 따라 LP 플레이어를 CD 플레이어로 바꿨는데 내 방에는 지금도 LP 플레이어와 그때 사 둔 LP 판들이 유물처럼 남아 있다.
타워 레코드는 선셋 불러바드 8400대에 있는데 오른 쪽에는 팝 전문 가게가 있고 그 건너편에 클래시컬 전문 가게가 있다. 나는 미국에 처음 왔을 때 주말이면 종종 이 동네를 찾아 가 양쪽 가게를 왕래하며 시간 보내기를 즐겨 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때 즐겨 듣던 팝과 클래시컬들이 즐비하게 진열된 가게 안을 돌아 다니면서 나의 청춘을 추억하는 일이 센티멘탈 하기까지 했다. 그냥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가슴이 벅찼다.
폴 앵카, 팻 분, 닐 세다카, 새라 본, 해리 벨라폰테, 조 스태포드 그리고 냇 킹 코울의 음반을 보면서 속으로 내가 좋아하던 그들의 노래를 부르곤 했다. 그리고 길을 건너 가서는 레나타 테발디, 프랑코 코렐리,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프리츠 라이너, 브루노 발터 그리고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의 음반들을 들춰 보느라면 종로에 있던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가 그리워지곤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집회소 같았던 타워 레코드가 문을 닫는다. 파산을 해 재고가 바닥이 나면 완전히 폐업한다. 타워 레코드의 종말은 특히 클래시컬 팬들에게는 거의 비극적인 사건이다. 전국적으로 클래시컬 판매점이 몰사하다시피한 요즘 마지막까지 버티던 타워 레코드가 문을 닫으면 LA를 비롯한 대도시의 클래시컬 팬들은 홈리스 신세가 되는 셈이다.
타워 레코드와 함께 역시 선셋에 있는 버진 레코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클래시컬 전문실이 있었다. 그런데 이 것이 언젠가부터 없어지고 이제 클래시컬CD는 가게 뒷쪽 안 보이는 곳의 몇 안되는 진열대에서 괄시를 받고 있다. USA 투데이가 슬그머니 클래시컬CD 소개를 중단한 것이나 비슷한 일이다.
지난 달 26일 저녁 선셋의 시사회실에서 영화를 보기 전에 타워 레코드를 찾아 갔다. 먼저 클래시컬 가게엘 들렀는데 실내 사방에 ‘25% 할인’과 ‘몽땅 판매’라는 사인이 붙어 있다(사진). 나이 먹은 손님들이 CD를 무더기로 사가고 있었다.
종업원 제리에게 “이가게문 닫으면 어디 가서 CD 살 수 있니”라고 물으니 패사디나에 있는 캔터베리 레코드를 알려 주었다. 제리는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타워가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말을 반복했다. 제리에게 이 것 저 것 물은 뒤 가게 안을 어슬렁 대면서 걸어 다니는데 제리가 내게 다가와 “이 가게 문 닫으면 나 고용 해 주겠니”라고 진지하게 묻는다. 아마도 나를 클래시컬CD 가게 주인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일보기자”라고 소개 했더니 이번에는 진반 농반으로 “신문사 말단직이라도 좋으니 취직시켜 달라”고 말했다. 일리노이에서 왔다는 그가 가게가 문을 닫으면 갈 곳이 막막한 것 같았다.
나는 가끔 클래시컬 기사를 쓸 때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 가게에 전화를 걸어 점원들에게 묻곤 했는데 그들은 백과사전식 지식의 소유자들이다. 이 날도 제리에게 가게에 틀어 놓은 음악명을 물으니 러시아 작곡가 라인홀드 글리에르의 첼로협주곡이라며 그의 교향곡 제3번이 매우 좋다고 친절히 알려 주었다. 둔중한 첼로의 선률이 타워의 죽음을 애도하는것처럼 들렸다. 그냥 나오기가 섭섭해 브람스교향곡 전4곡을 각기 다른 지휘자가 다른 교향악단을 지휘해 연주한 CD를 샀다. 이어 건너편 팝가게에 가서는 로이 오비슨, 패츠 도미노, 브렌다 리, 칼 퍼킨스와 클리프 리처드의 CD를 사들고 나왔다.
타워가 파산한 이유 중 하나가 사람들이 가게에 가는 대신 컴퓨터로 CD를 사고 있기 때문이다. CD뿐 아니라 책도 온라인으로 사고 있는데 CD와 책을 온라인으로 사는 것은 e-메일로 연애편지 쓰는 것만큼이나 분위기 없는 행위다. 가게를 찾아가 음악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호흡을 함께 하면서 음악과 글의 감촉을 느껴 보는 일은 생의 작은 기쁨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박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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