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으로 유명한 배우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지난달 24일로 90세가 됐다.
내가 그를 처음 스크린에서 본 것이 중학생 때 서울 서대문의 동양극장에서 본 ‘지상에서 영원으로’(From Here to Eternity·1953)에서였다. 이 영화 때문에 나는 영화광이 됐다.
보그나인은 여기서 하와이 스코필드 병영의 비대한 새디스트 영창장으로 나와 자기를 ‘팻초’(뚱보라는 속어)라고 부르며 박박 기어오르는 수감자인 프랭크 시나트라를 때려죽인다. 못 생긴 얼굴에 사이가 벌어진 앞 이빨을 드러내며 그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모양이 꼭 거대한 고릴라 같았다. ‘팻초‘는 나중에 시나트라의 친구인 고집불통 졸병으로 나오는 몬고메리 클리프트의 칼침을 맞고 비명횡사한다.
보그나인은 황소 눈알을 한 소도둑 같은 얼굴에 체구가 커 악역에 많이 나왔다. 그의 또 다른 유명한 악역은 스펜서 트레이시가 주연한 이색 스릴러 ‘블랙 록의 흉일’(Bad Day at Black Rock·1955)에서의 역. 그는 여기서 한 작은 마을의 미끈덕 미끈덕한 무뢰한으로 나와 마을에 실종사건을 수사하러 온 나이 먹은 외팔이 형사 트레이시를 위협하다가 오히려 트레이시의 당수 솜씨에 나가떨어진다.
보그나인이 과거 스크린에서의 자기 이미지와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준 영화가 흑백 소품 ‘마티’(Marty·1955·DVD·사진)이다. 매우 나이스하고 소박하며 가슴을 훈훈하게 만들어주는 이 영화는 브롱스의 30대 노총각 푸줏간 주인의 고독과 참 사랑 발견을 그린 TV 작가 패디 차예프스키의 동명 TV 드라마가 원전이다.
나이 34세가 됐는데도 홀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마티는 비록 못 생겼지만 감수성 예민하고 착한 효자인데 직업도 남들이 깔보는 것이어서 만나는 여자마다 퇴짜를 놓는다.
그런 마티가 어느 토요일 밤 친구와 함께 댄스홀에 갔다가 파트너에게 딱지를 맞은 온순하게 생긴 29세의 노처녀 클라라를 만나게 되면서 둘간에 소박한 사랑이 서서히 꽃망울을 맺는다. 그리고 이 사랑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시련을 겪은 뒤에 아름답게 활짝 핀다.
불과 2년 전에 ‘지상에서 영원으로’에서 사람을 잡던 보그나인은 여기서 큰 마음과 연민의 가슴을 지닌 마티의 모습을 폭과 깊이를 지녔으면서 아울러 거의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민감하게 묘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희로애락을 동감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이 연기로 오스카 주연상을 받았다. 자신의 실제 성격과 많이 닮은 마티 역으로 인해 보그나인은 그 후로 악역 단골이라는 오명을 벗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리 마빈과 공연한 ‘북극의 황제’에서처럼 가끔 악역을 맡았다.
90세의 나이에도 건강하고 쾌활한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보그나인은 2차 대전 때 해군에 복무했다가 제대 후인 28세 때 어머니의 권유로 배우가 돼보기로 했다. 고향 코네티컷의 연극단과 버지니아의 바터 극장에서 연기를 하면서 바닥부터 시작한 착실한 배우다.
뉴욕에서 연극과 TV 드라마에 나온 것이 계기가 돼 할리웃에 발탁됐는데 물론 처음의 많은 역이 웨스턴 ‘베라 크루스’에서처럼 악역. 이런 이미지를 바꿔 놓은 ‘마티’에의 출연은 순전히 운 때문이었다. 차예프스키와 감독 앤소니 맨은 TV 드라마에서 열연한 로드 스타이거를 영화에도 쓰려고 했으나 스타이거가 뮤지컬 ‘오클라호마’에 나오기로 계약을 해 보그나인을 고르게 된 것. 영화는 남우주연상 외에도 작품·감독 및 각본상을 휩쓸었다.
떡 벌어진 가슴 탓인지 높은 옥타브의 웃음소리를 내는 보그나인은 짓궂은 장난을 잘하는 사람으로 호인 기질을 지녔다. 87세까지만 해도 자신이 버스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팬들을 만나고 강연도 했는데 그 다음해 버스운전을 중단하고 요즘은 여객선 유람을 즐기고 있다.
현재 LA 인근 콜드워터 캐년에 살고 있는 보그나인은 최근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난 정말로 일을 더 하고 싶다. 나는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다시 젊어지는 것을 느낀다”면서 “그러나 요즘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내 이름이 거론되면 그가 아직도 살아 있어”라고 묻는다고 말했다.
내가 본 그의 영화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주발’‘바이킹스’‘더티 더즌’‘와일드 번치’‘윌라드’ 및 ‘포세이돈 어드벤처’등인데 ‘윌라드’에선 쥐떼들이 보그나인을 물어 죽인다. 그는 현재 TV용 영화를 찍고 있다. 그의 모습을 다시 스크린에서 봤으면 좋겠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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