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며칠 샌드라 데이 오코너 전 대법관의 ‘남편 사랑’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알츠하이머 환자인 남편이 요양소에서 만난 어떤 여성과 사랑에 빠져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위안을 얻는다는 보도이다.
오코너 가족 이야기를 처음 보도한 것은 요양소가 소재한 피닉스의 한 TV 방송이었다. 인터넷으로 방송을 찾아보니 ‘케이’라는 여자 친구의 손을 꼭 잡고 다니는 그의 남편 존 오코너 씨는 아이처럼 행복해 보였다.
알츠하이머는 거대한 지우개 같은 질병이다. 평생의 기억을 지워내고, 지각능력을 지워내고, 마침내는 육체적 기능까지 지워버린다. 그런 몹쓸 병마의 포로가 되어 하루하루 암흑 속에 허물어져가던 환자가 사랑이라는 햇살에 이끌려 생기를 되찾는 모습은 가족들에게 위안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우자의 심정도 그러할까?”에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오코너 대법관에 박수를 보낸다. 방송 인터뷰에서 그의 아들은 “사랑에 빠진 틴에이저 같은 아버지의 모습에 어머니는 안도하고 기뻐한다”고 전했다. 77세 남편의 순진무구한 행복감을 바라보며 동갑의 노부인이 짓고 있을 은은한 미소가 상상이 된다.
아주 오래된 인연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라는 생각이다. 사랑과 미움과 분노와 질투 … 희로애락의 모든 감정들을 오랜 세월 함께 살아내고 나면 어느 순간, 날카롭던 소유욕은 희미해지고 측은지심만이 출렁이는 말간 마음의 상태 - 누구나 맛볼 수 있는 축복은 아니다.
‘오래된 인연’이 점점 귀해지고 있다. 사람이 태어나서 가장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는 대상은 배우자인데 부부들의 평균 결혼기간이 짧아지고 있다.
최근 인구센서스 분석을 보면 결혼해서 25년을 같이 사는 부부가 절반이 못 된다. 1950년대에 결혼한 부부는 70%가 은혼식을 맞았지만 1970년대에 결혼한 부부 중에서는 그 숫자가 남성 49.5% 여성 46.4%에 불과하다.
은혼식을 맞았다고 금혼식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겉으로 멀쩡하게 잘 살던 부부들이 자녀 대학입학을 기해, 막내의 결혼을 기해, 남편의 은퇴를 기해 갈라서는 경우들이 흔해지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유행하는 황혼이혼이다. 한국에서는 결혼 25년 이상 부부의 이혼 신청사례가 결혼 3년 이하인 젊은 부부들 경우보다 오히려 많아지고 있다고 한다.
아주 단순하게 보면 젊은 부부들은 너무 참을성이 없어서, 나이 든 부부들은 너무 꾹꾹 참다가 뒤 늦게 폭발해서 이혼을 한다. 결혼 50주년, 60주년을 맞는 노부부들은 그 자체로 존경을 받을 만한 시대가 되었다.
왜 이렇게 쉽게 관계들이 깨어질까. 부부가 이러한데 다른 관계들은 오죽할 까. 기본적으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사라진 결과라고 본다. 매사에 이해타산이 앞서서 조금의 손해를 참지 못하는 세태가 문제이다.
오래 같이 지낸 노부부, 아주 오래된 인연의 특징은 서로에 대한 푸근함이다. 갓 태어난 사랑이 불같은 열정이라면 세월과 씨줄날줄로 엮이며, 산전수전 겪으며 성숙한 사랑은 그저 편안함이다.
그래서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묻질 않어 …그냥 서로를 사는”<황지우 ‘늙어가는 아내에게’ 중>것이고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문정희 ‘남편’ 중에서> 하고 접는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오코너 대법관이 52년 부부의 연을 맺어온 남편의 ‘바람’에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가 행복하니 내가 행복한 것이다.
이 생의 관계들은 모두 억겁의 인연의 결과라고 불교는 가르친다. 배우자, 오랜 친구, 연인 … 많은 인연들은 대부분 설명 불가한 부분들을 안고 있다. 인연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맺어진 인연들에 성실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오래된 인연을 얼마나 가졌느냐”로 훗날 우리의 생은 평가받는 것이 아닐까?
권정희 논설위원 /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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