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일본과 한국의 어둠과 빛이 엇갈리는 달이다. 일본에게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제국주의 아시아 정복의 과대망상이 산산이 깨어지는 잔인한 달이나 한국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치어 덫에 걸린 짐승처럼 신음하던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달이다.
작년 여름 일본인 손님들이 우리 집에서 며칠 묵고 다녀갔다.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청바지를 입은 전후 세대들이다. 나는 일본어를 모르고 그들은 한국말을 모르니 서투른 짧은 영어로 통하는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들은 얼굴만 맞대면 허리를 굽히고 절을 하는 바람에 한 번은 서로 이마를 부딪칠 뻔했다. 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나와의 작은 문화충돌이었다.
그들이 지갑에 넣고 다니는 일본 최고 화폐단위인 1만엔 지폐 인물을 보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폐에 그려진 얼굴은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의 초상이다. 한국 돈 세종대왕의 초상이 그려진 1만원권에 해당 된다. 지폐 속의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는 누구인가? 그의 ‘탈아론’은 1885년 3월 모 일본 일간지 1면에 게재된 그의 사설 제목이다. 중국과 조선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여 동아시아 패권을 움켜쥐라는 논리다. 또한 그는 그의 ‘조선정략론’이라는 전쟁 논리로 일본 제국주의 아시아 대륙 침략의 불씨를 당긴 사람이다.
그의 논리는 일본 역사교과서에 인용되고 일본의 계몽사상가의 등불의 아버지로 추앙받고 있다. 100년 전 죽은 그는 오늘을 사는 일본인의 지폐 속에서 국민 정체성의 뿌리로 살아서 숨쉬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앞서 미국 대륙팽창의 정당성의 논리를 핀 사람은 지구 반대쪽 미국이었다. 1839년 언론인 존 오설리번은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논설을 게재한다. 19세기 미국대륙에서 서쪽으로 태평양까지 나아가 그 너머까지 미국 영토의 확대는 신에게 부여받은 필연적인 운명이라는 논리다. 이 글은 텍사스, 오리건,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합병과 알래스카, 하와이, 필리핀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할 때 미국 백인 우월론자들이 자주 쓰던 말이다. 그의 논설은 남의 땅을 정복하는 것을 정당화시킨, 이를테면 면죄부를 주는 논리다. 미국의 영토 확대는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산불처럼 번져갔다.
19세기 일본은 긴 잠에서 깨어나 동이 튼다. 개혁의 문을 연 일본은 봉건시대의 무사정권을 무너뜨린 근대화 체제의 명치유신 정권이 탄생한다. 무사 출신 사무라이들이 주역이 된 새로운 정권은 태평양전쟁을 잉태하는 산실이 된다. 사무라이들은 상투를 자르고 허리에 찬 칼 대신 총을 쥐고 나막신을 군화로 갈아 신은 대일본제국의 황군으로 변신한다. 그들은 군사대국으로 무장한 광기 어린 폭력집단으로 야만적인 아시아 대륙 침략과 약탈과 살육의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일본은 패망 후에도 막부시대로부터 2차 대전을 주도했던 근대의 역사를 관통하는 사무라이들의 일대기를 그리는 역사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긴 칼과 짧은 칼을 허리에 차고 종횡무진으로 일본역사의 무대를 누볐던 풍운아들이 작가의 생동감 있는 필치로 현대사의 무대에 다시 살아서 움직인다. 그들은 일본 역사의 얼룩을 지우고 찬란한 색깔로 채색하고 있다. 패전으로 황폐했던 일본인들의 가슴에 다시 자부심과 우월감을 심어주고 있다.
2차 대전 전사들의 피 묻은 셔츠가 전시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는 전범들을 영웅화시키고 전쟁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새 세대들의 전쟁 학습장이다. 사무라이 후예들은 전쟁을 하지 않는 동안도 칼을 갈고 있어 녹슬지 않는다. 싸늘한 광채를 뿜는 예리한 사무라이 칼날이다. 일본의 공중곡예와 같은 현란한 국제 홍보 외교에 밀려나지 않는 한국의 외교 전략은 무엇일까? 오늘의 일본, 선진국 경제대국의 하드웨어를 움직이는 일본의 소프트웨어는 칼의 문화, 사무라이 정신이다.
박민자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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