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 지인이 등산을 권유할 때 나이 70에 숨차고 힘든 산행에 새삼 도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응답했다. 그러다 언뜻 앞으로 10년은 더 살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앞으로 남은 10년을 이미 주어진 것에 길들여진 대로 편하게 지나고 말아야 하나?
그래서 선뜻 샌개브리엘 캐년으로 따라나섰다. 대열을 따라 가기에는 너무 힘이 부쳐서 그냥 뒷전에서 숨이 차 허둥대다가 산행을 마쳤다. 그 날부터 며칠 동안은 리가 아파서 절룩 거리며 무척 힘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주말만 되면 에인젤스 크레스트, 마운트 볼디 등 부지런히 따라다니게 되었다. 가쁜 숨도 고르게 되고 아픈 다리도 풀리게 되는 데에는 3개월이 걸렸다.
산을 오른 지 반년이 지났을까, 단추를 끼우지 못하고 넥타이로 가리고 다니던 그 많은 바지가 어느새 편안해졌다. 오랫동안 침을 맞고 값비싼 약을 먹어도 별효과 없이 일주일에 몇 번씩 왼쪽 다리에 쥐가 나서 밤잠을 설치던 일이 어제 같은데 지금은 한 달에 한두 번 정도로 호전되었다. 하산하는 길에 겨우살이(mistletoe)를 따다 말려서 끓여마시니 산 내음 풍기는 신선한 맛에 매료되어 잘 포장된 고급스런 갖가지 차와 커피통 위에는 먼지가 소복이 쌓이고 있다.
병 고치고 복 받는 일에 머무르지 않고 그것을 뛰어 넘어야 종교성이 살아나듯이 발 건강해지고 약초 따는 그런 소득과 재미를 뛰어 넘어야 산행의 길에 빛이 나는 듯하다. 체력의 한계에 인내로 도전함으로써 모든 집착에서 자유함을 경험하는 성숙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 같다.
동문들과 산행을 하는 중에 브라질에서 부지런히 등산을 즐기며 20년을 살다가 LA로 이주한 후배를 만났다. 먼지가 풍겨나는 돌밭 길을 밟으며 후배의 부인이 “브라질 산길은 축축한 습기 때문에 잘 미끄러지는데 LA 산길은 뽀송뽀송해서 너무 좋다”고 했다. 물기 없는 메마른 산, 먼지 풍겨나는 돌밭길이 뽀송뽀송 하다니! 즐거움이 품어 나오는 희망의 언어 그 한 마디에 사막의 건조한 풀들과 거친 온산이 고향 땅보다 더 정감이 넘쳐 흐르는 듯 했다. 새로운 리듬으로 발걸음이 훨씬 가벼워지면서 말(하늘)속에 현실(땅)이 살아 움직임을 경험한다.
지난해에 정기진찰을 받으며 의사와 대화 하는 중에 “약 안 먹고 교통사고 안 나는 것만도 부모에 효도하는 것입니다”하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그동안 한국의 정서를 버리지 못하고 자식들 때문에 서로 매달리고 엉켜 속을 썩이던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주치의의 무심코 던진 그 한 마디가 마음에는 평화, 자식들과 엉켜 있는 속박에서는 벗어나는 자유함을 안겨주었다. 말은 현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재창조하는 삶의 투영이다.
몇 주 전 마운트 볼디의 짙은 구름 속에서 눈산을 오르며 체험한 신비한 자연의 참 모습은 정녕 잊을 수 없는 장엄한 환상의 하루였다. 빽빽한 도시 공간 속을 일상적으로 헤쳐 다니다가 뽀송뽀송한 여름 산길, 은빛 나는 하얀 겨울산, 1만피트가 넘는 정상까지 한나절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LA에 사는 특권이고 은총이다.
낯선 땅에서 신발 끈을 동여매고 생존을 위해 막노동에 뛰어들다 보니 감정이 경직되어 마음이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10년이 지나서야 강렬한 사막의 햇빛, 그 틈새에서 피어나는 다양한 꽃들이 눈에 들어오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내 생애에 또 하나 잘한 일이 있다면 내 뼛가루가 뿌려질 마지막 종착지의 보드라운 흙을 밟는 일인 듯 하다. 만물을 품어 주는 보드라운 흙, 발로 그 흙을 비비니 내 몸에 전류가 흐르듯 생명의 원천이 느껴지는 것 같다. 내 몸가루의 자양분을 빨아들여 꽃으로 토해낼 대지의 온갖 야생초의 생명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명을 다하는 날까지 주말마다 힘차게 산행을 하고 싶다.
장익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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