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애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제임스 F. 노먼 대위.
◆1대(제임스 F. 노먼) 한국전쟁 파일럿, 1953년 휴전직후 순직
1923년 12월23일 뉴욕주 새러낵 레익 태생인 제임스 F. 노먼은 스피드 스케이팅 북미챔피언이자 알아주는 하키선수였다. 2차대전 발발, 그중에서도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그를 ‘군의 길’로 인도했다. 해군에 입대한 그는 소정의 훈련을 받은 뒤 항공모함 사라토가호와 렉싱턴호에서 해군 소속 항공대 캡틴으로 복무했다. 1945년 2차대전 종전 뒤 그는 잠시 군복을 벗고 하키선수로 아이스링크를 누비다 1949년 해군에 복귀했다. 그 사이에 두 아들(팀과 짐)이 태어났다.
제임스 노먼, 나아가 3대를 잇는 노먼 패밀리와 한국의 인연은 1950년 6월 한국전 발발에서 비롯됐다. 대잠수함용 전투기 P2V 조종을 맡은 노먼 대위는 한국전이 일어나자 한국으로 파병돼 3년 내내 전투를 수행했다. 부인은 두 아들을 데리고 시애틀에 살다(복귀 전 노먼은 워싱턴주에서 하키선수로 활약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친정부모 곁으로 이사했다.
1953년 7월, 노먼 대위의 장모가 사망했다. 노먼 대위는 모처럼 휴가를 내 장례식에 참가한 뒤 한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뒤 휴전협정 조인. 3년에 걸친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의 군복무는 끝나지 않았다. 군당국은 정예파일럿인 그에게 좀더 군에 남아 전투기와 수송기 등 항공기들을 미본토와 대만 등지로 옮기는 임무를 요청했다. 그는 수락했다. 한국과 미국, 한국과 대만을 날아다니는 특수임무로 쉴새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졌다. 한달남짓 지난 9월5일, 장모 사망 이후 처음으로 노먼 패밀리가 모두 모였다는 그날, 다시 한국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노먼 대위는 그날 밤 싸늘한 시신이 되어 귀가했다. 한국으로 향하는 새크라멘토 인근 맥클렌런 공군기지에서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부인은 두 아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홀로 뒷바라지를 하다 재혼해 지금은 미 동남부에 살면서 북가주 아들과 이따금 혈육의 정을 나누고 있다.
◇2대(티모시 J. 노먼) 아버지와 아들을 한국에 바친 심리학박사
아버지(제임스 노먼)와 아들(케빈 노먼)이 아니었다면 그 사이의 핏줄을 잇는 2대 티모시 J. 노먼 박사가 한국/한국인과 이토록 짙은 인연을 맺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티모시 노먼 박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인 1945년에 태어났다. 한국으로 치면 해방둥이다. 4년동안 전장을 누빈 예비역 해군대위 제임스 노먼이 워싱턴주에서 하키선수로 활약한 덕분에 그는 시애틀 인근 전원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3년 뒤엔 동생 짐이 태어났다. 1945년 제대부터 1949년 해군복귀까지 약 4년동안 모처럼 4인 가족이 함께 사는 동안 팀이 기억하는 아버지상은 하키선수였다는 것과 버튼을 눌러 자동으로 창문을 여닫는, 당시로서는 신식인 링컨 승용차를 무척 좋아했다는 것 등이다.
해군에 재입대한 뒤에도 해군하키팀 선수였던 아버지 덕분에 팀은 다섯 살 때 그팀의 워터보이(야구의 배트보이) 노릇을 했다는 것, 그 얼마 뒤 한국에서 전쟁이 났다며 전장으로 떠나는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가 매우 슬퍼한 기억도 어슴푸레 갖고 있다. 그리고 한국전 도중에 한번 휴가차 왔던 아버지, 외할머니 장례식 때 잠깐 본 아버지, 그로부터 불과 두어달 뒤 한밤중에 도어벨이 울리고 문밖에 장교 2명이 서 있었던 장면, 그때 청천벽력 같은 아버지의 죽음 소식에 어머니가 “No라고 고함쳤던 장면 등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나이 8세 때였다.
그렇다고 이후의 삶이 크게 주름진 것은 아니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비록 돈은 쪼들렸지만 외삼촌이 샌프란시스코 집 근처로 이사를 와 보살펴줬고, 재향군인회 등에서 팀과 짐 형제의 학비를 비롯한 재정적 도움을 줬다. 형제는 별 구김살 없이 학교생활이나 스포츠활동을 하며 성장했다. 심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티모시 노먼 박사는 새크라멘토 북부 조그만 도시에 살면서 소노마에 있는 해나 보이스 센터에서 임상심리 디렉터로 근무중이다. 가톨릭재단에서 운영하는 이 학교는 정서장애 등으로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한 남학생 100여명이 재학중인 고교과정 특수학교다. 티모시 노먼 박사는 거리상 출퇴근이 여의치 않은데다 한밤에도 긴급상담 등 할 일이 만만찮아 주초에는 학교에서 숙식하며 학생들을 보살피는 일에 열정을 쏟고 있다.
아들 케빈 노먼 대위마저 한국에 바친 그는 심리상담 전문가답게 아주 담담하고 침착한 어조로 “아버지와 아들이 한국과 특별한 사연을 갖게 됐으니 나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남다른 연대감과 친밀감을 갖게 된다”며 “2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어린이들이 학업에 과외활동에 매우 열성적인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말한다. 케빈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장례식 때 케빈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형인 션이 말했듯이, 케빈은 자기목숨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한국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건네준 것>일 뿐”이라고 정리한다. 그는 그러나 깔끔하게 정리된 그의 사무실 이곳저곳에 아들의 사진들, 아들고 함께 찍은 사진들, 아들이 타던 군용기와 아들이 묻히던 날 장례식 사진 등이 걸려있고 놓여있고 그 사이에 항공기를 배경으로 찍은 빛바랜 아버지의 사진도 걸려 있었다.
◆3대(케빈 M. 노먼) 주한미군 파일럿, 2003년 아산에서 산화
티모시 노먼 박사는 삼남매를 뒀다. 위로 두 아들(션과 케빈) 막내딸(콜린)이다. 좀체 말수가 적은 노년의 심리학 박사도 세 자녀를 떠올리면 은근히 솟아나는 자부심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다. 셋 모두 공부도 운동도 잘했고 리더십과 의협심, 대인관계도 좋았다고 한다. 맏아들 션(38)은 가주에서 최우등 용맹메달을 2차례나 수상한 소방국 간부다. 막내딸 콜린(32)은 연방수사국 소속 범죄심리학 전문가인데, 간난아이 2명을 보살피느라 휴직중이다.
살아있다면 36세가 됐을 케빈은 특히 탁월했다. 아버지의 자랑이 아니다. 미군과 언론, 지역사회의 일치된 평가다. 케빈의 살신성인 산화에 따른 덕담성 예찬만도 아니다. 고교시절에 이미 자원봉사 소방관으로 2차례나 생명이 위독한 사람을 구해내 나파시티에서 ‘올해의 시민’에 선정됐을 정도다. 육사 시절에는 사관학교 대항 풋볼대회 최우수선수(MVP) 트로피를 차지하기도 했다.
케빈은 1973년 외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의 직장(해나 보이스 센터)이 있는 소노마로 이사해 그곳에서 가톨릭계 초등학교와 저스틴-시에나 가톨릭고교를 졸업했다. 군인의 길을 걷기로 한 그는 뛰어난 성적과 리더십, 강인한 체력 등으로 미육사(웨스트포인트)에 진학했다. 바버라 박서 상원의원이 그의 육사입학 보증추천인을 맡았다.
청소년기는 물론 육사시절, 군복무시절 동료들에 따르면 케빈은 매사에 적극적 진취적이고 유머감각이 탁월한데다 안되면 되게 하고 남들에게도 하면 된다는 신념을 북돋워주는 독특한 재능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사관생도 시절 2년동안 룸메이트였던 짐 라일리가 쓴 추도사를 보면 케빈의 다재다능한 측면들이 뭉텅이로 짚혀진다. 그는 추도사 첫머리에서 “아들이요 형제요 남편이요 운동선수요 코미디언이요 스토리텔러요 소방관이요 사관생도요 장교요 파일럿이요 영원한 친구”이며 “결단력과 긍지와 해학과 열정과 상조정신과 헌신성과 사랑과 보살핌과 충성심”을 갖춘 케빈 노먼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이라크전선에 파견돼 있던 라일리는 추도사 말미에 “밤이면 이라크에서 내가 올려다보는 하늘과 별들이 한국과 소노마, 그리고 케빈의 친구들과 가족이 있는 어느 곳이라도 덮어주는 그 하늘과 같은 하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적었다.
케빈은 육사동기인 브랜디와 결혼했다. 노먼 부부가 된 두 동기생은 졸업후 임지(주한미군)도 특과(파일럿)도 같았다. 운명의 그날, 2003년 8월12일 점심시간 직전, 케빈 노먼 대위는 오산기지에서 C-12기를 몰고 서울기지로 향했다. 메인테넌스 체크를 겸한 루틴 훈련비행이었다. 아산을 지날 즈음 갑자기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기체이상. 케빈 대위와 부조종석 데이빗 스노 준위는 여느 때 같았으면 응당 낙하산 등으로 탈출을 시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아래는 민가마을. 케빈 대위는 최후까지 필사적으로 조종간을 붙잡고 씨름하며 민가를 피해 농지에 추락했다. 두 젊음은 그곳에서 산화했다. 공중제비를 돌며 내리꽂히던 C-12기가 마지막으로 아슬아슬 피해간 곳은 때마침 점심식사를 위해 사람들이 모여든 식당과 이웃집들이었다. 최후의 방향틀기가 아니었다면 수많은 민간인 희생이 불가피했을 것이라고 아산시 공세리 마을 주민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한국전 참전 뒤 특수임무를 수행하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50년 전 할아버지처럼, 50년 뒤 한국땅에서 산화한 그의 나이도 30세였다.
소노마시는 그해 10월25일을 “케빈 노먼 대위의 날”로 선포했다. 오는 25일 메모리얼 데이를 맞아 그의 유해가 안장된 소노마시 베테런스 메모리얼 팍에서 케빈 노먼 순국 6주기 추도식과 함께 고인에 대한 미국정부의 십자훈장 추서식 및 한국정부의 감사패 헌정식이 열린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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