붙잡히고 갇히고 쫓겨나고
발목엔 전자족쇄 채워지고
2008년 5월12일,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아이오와주 포스트빌의 한 육류가공 공장을 덮쳐 이민노동자 389명을 체포했다. 요원 수백명이 참가하고 엄호 헬기까지 동원된 작전이었다. 베로니카 쿠메즈. 그곳에서 일한 불체노동자 중 한명인 그가 소수계 언론연합 NAM(New America Media) 마르셀로 바비에 기자에게 ‘그날과 그날 이후’에 대해 털어놨다.
<편집자 주>
5월12일은 베로니카 쿠메즈의 캘린더에 항상 살아있을 얼룩이다. 2008년 그날, 그녀가 조각조각 치킨을 스티로폼 박스에 담는 이을 하는 아이오와주 포스트빌의 공장에 무장한 ICE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급습 1주기 전날 밤 이뤄진 전화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어제 일만 같아요. 이후 모든 게 참 고역이었죠.”
ICE는 쿠메즈를 포함해 모두 389명의 이민노동자들을 옭아맸다. 기습단속의 엄청난 규모를 가리키는 숫자다. 작전에 투입된 요원만 수백명이었다. 헬리콥터 엄호까지 동원됐다. 수백만달러 가격표가 붙을 만큼 돈도 많이 든 작전이었다. 그것은 포스트빌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타운경제는 엉망이 됐다. 여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 체포자들에 가해진 타격이 어떤 것인지 5/12 그후 일그러진 삶을 보면 알 수 있다. 기습단속 그날,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부드러운 어조의 쿠메즈는 요원들에게 잡히지 않으려고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녀는 박스더미 속에 숨었지만 곧 발각됐다. 한 요원은 이민노동자들이 숨으려 한 것에 열을 받았는지 박스더미 속에서 그녀를 끌어낼 때 머리를 쥐어박았다. 요원은 이내 여자인 줄 몰랐다며 사과를 하더란다.
그것은 모욕으로 점철된 그후 1년의 첫번째 모욕일 뿐이었다. 보호관찰 이민자로서 생소한 삶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날 체포된 389명 중 수십명이 그랬듯이 쿠메즈는 발목에 채워진 전자족쇄를 통해 연방요원들의 감시를 받는 등 줄곧 체포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케이스는 악명높게 더딘 이민재판을 한치한치 거쳐야 했다.
걸려든 사람들은 자신의 무기력을 확인하는 의식이라도 치르는 것처럼 날이면 날마다 전자족쇄를 각자 집 벽의 소켓에 꽂아 충전시켜야 한다. 사실상 쇠고랑이 채워진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쿠메즈는 발목족쇄가 “귀찮지만 별수없이 겪어야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발목족쇄가 채워진 채 석방된 노동자들 가운데 몇몇에게는 임시노동허가 특전이 주어졌다. 수사관들에게 협조해 자신의 상사들을 사기, 미성년노동, 이민법위반 등 혐의로 기소할 수 있게 한 덕분이었다.
그러나 쿠메즈에게는 아직껏 그런 복(?)조차 없었다. 일을 못하니 포스트빌 교회들의 적선에 의지해 겨우 생필품을 사거나 렌트비를 충당한다.
불안과 고독도 그녀의 뉴라이프 목록 중 큰 부분이다. 5/12 기습단속 뒤 몇주 몇달 사이에 과테말라 고향마을에서 온 피붙이 네트웍이 박살났다. 세명의 오빠를 비롯해 모조리 체포되거나 추방되거나 아니면 포스트빌을 떠나버렸다. 가장 억장이 무너지는 일은 지난해 9월에 있었다. 14살 난 딸 실비아를 과테말라로 보내야만 했다.
모녀는 포스트빌에서 첫해를 보내면서 나름 안정을 얻었다. 그들은 다른 이민노동자 6명과함께 한집에서 살았다. 실비아는 공립학교에 다니며 영어를 배웠다. 기습단속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1주일만에 그 집은 괴기스런 빈집이 됐다. 모두 걸리거나 도망쳤다. 버려진 차 2대는 드라이브웨이에 그대로 쳐박혀 있다. 싹쓸이 단속에 걸리거나 도망쳐버렸다.
쿠메즈와 남매지간인 파우스티노 로페스는 그 집으로 이사했다가 체포될 위험이 너무 커 도로 떠나버렸다. 쿠메즈는 돈을 못버는 처지에 교회의 적선으로 실비아를 제대로 건사한다는 게 어려우리란 걸 알고 있었다. 이별보다 더한 공포가 그녀를 짓눌렀다.
딸 실비아 역시 불체자였다. 걸렸다 하면 벌어질 일 때문에 쿠메즈는 노심초사했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충격을 딸만은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실비아도 그런 잿더미 속 삶에 신경이 쓰인 나머지 과테말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몹시도 무덥던 9월 초 어느날 오후, 기습단속으로부터 넉달쯤 지난 그날, 쿠메즈와 실비아는 포옹과 눈물로 작별을 고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모녀는 모른다. 다만 수삼년은 걸리리란 건 알고 있다. 짙은 머리를 질끈 치켜올리고, 후크형 귀고리를 고쳐매고, 친구들과 마지막 초치기 통화들을 끝내고, 억지웃음을 머금은 채 스냅사진 몇방을 찍은 뒤 안녕이라 말하며 실비아는 드라이브웨이에 선 밴에 올라탔다. 시카고 오해어공항까지 다섯시간, 거기서 다시 과테말라로….
남은 쿠메즈는 문득 홀로였다. 한 손님에게 그녀는 부엌에서 기나긴 아이오와의 겨울 할러데이 시즌이 되기 전에 딸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딸이 떠나고 한두시간 뒤 쿠메즈는 세인트 브리짓성당에서 흐느꼈다. 그녀의 일을 맡아주는 소니아 파라스 콘라드가 위로했다. 쿠메즈는 말했다. “우리를 다시 하나되게 해달라고 항상 주님께 하소연을 하지요.”
지금 실비아는 과테말라의 산호세에 있다. 16세 언니 아주세나, 10세 남동생 호세 알레한데르와 함께 할머니댁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의 송금이 없으면 실비아가 학교에 다닌다는 건 사치랄 수밖에 없다. 학교 대신 집에서 더 어린 동생들과 조카 넷을 돌봐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곡절에도 불구하고 쿠메즈는 여전히 마지막 희망을 붙들고 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다 적발된 미성년 조카의 가디언으로 특별비자를 받으려고 애쓰고 있다. 그게 있으면 아이오와에 머물며 일할 수 있게 되고 과테말라의 어머니와 자녀들에게 다시 돈을 보낼 수 있다. 그녀는 5/12 기습단속 1주기 항의시위를 말한다. 그러나 바로 그런 날에도 발목에 채워진 전자족쇄 충전을 거를 수는 없다. 그녀는 아직 출발점에 갇혀 있다. 거기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이다.
<출처: 뉴 아메리카 미디어(www.newamericam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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