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SF, 새크라멘토, 샌디에고
주민 10명중 1명 이상이 한인
동양과 서양은 서로 지구의 반대편에 자리를 하고 있어서 그런지 사고방식이라던가 동작 등이 서로 반대인 것이 적지 않다.
옛날의 국정을 보아도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철저한 쇄국주의를 고집하였지만 서양의 영국, 스페인, 화란, 포르투갈, 프랑스 등 국가에서는 오대양 육대주를 휩쓸고 다니면서 여러 나라와 수교를 꾀하였으며 식민지 획득에 주력했다.
잠자는 동양 3국을 깨어나게 한 것도 이들이다. 1835년은 미중수교협정(美中修交協定)이 이루어진 해인데 역시 미국의 주도적인 외교활동으로 성사가 된 것이며, 미일 수교(美日修交)는 1854년에 이루어 졌다. 고종황제의 대한제국과 미국의 수교 조약이 체결된 해는 1882년이다. 미국과의 이러한 수교조약으로 동양 3국에서는 미국에 이민을 보낼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제일 먼저 미국에 이민으로 입국을 한 동양인은 중국인들이다. 1848년 1월 24일 새크라멘토 근교의 콜로마(Coloma)라는 곳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캘리포니아의 역사를 뒤바꾸어 놓은“캘리포니아의 황금 붐”에 홀려서 일확천금을 꿈꾸며 입국한 중국인들인데, 1850년까지 무려 20,000여명이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모여들었다. 일본에서는 정부가 하와이의 사탕수수 재배회사들과 계약을 하고 농부를 모집해 하와이로 계약노동자로 송출했다.
1885년 2월에 첫 집단이 하와이에 도착하여 계약된 농장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9년 후인 1894년까지 29,032명이 계약노동자로 취업했다. 1896년부터는 미국의 수요자측에서 직접 이민을 모집 해 1898년까지 40,208명을 받아들였다.
1898년 하와이가 미국의 속지(territory)로 귀속되면서 미국 법에 의하여 계약노동이 불법화됨에 따라 그간에 계약노동자로 일하던 일본인 노동자들이 일거에 자유인이 되었다. 이 사람들이 갈망하던 미국 본토로의 이주가 가능해 진 것이다. 이리하여 수많은 일본인 농부들이 캘리포니아에 몰려들게 되었다. 또한 하와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최초의 미국시민 2세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현재 미국의 최고의 농경지로 꼽히는 캘리포니아의 샌호애퀸 밸리 농경지의 상당 부분은 이 시대에 하와이로부터 몰려든 일본계 농부들이 주동이 되어 개간한 땅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1906년까지 새로운 일본 이민 40,000여명이 하와이를 찾았는데 이들 가운데 과반수가 캘리포니아로 이주를 했다.
1882년 3월 24일(고종의 대한제국시대) 한미우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인 1902년 8월 20일 고종은“이민사업과 신문화(新文化) 교류사업을 장려하기 위해서”수민원(綏民院)을 설립하고 제1차 사업으로1903년부터 1905년 사이에 하와이 사탕수수밭 계약노동자 7,226명 (남자 6,048명, 부녀자 637명, 아이들 541명)을 송출했다.
이중 1,003명이 캘리포니아로 이주(1905~1907 사이)했다. 하와이의 일인 농부들은 대우개선을 요청하는 파업을 종종 벌였는데, 한인 농부들이 스트라이크 브레이커(작업을 계속하는 등 파업을 방해하는 무리)로 이용되고 있다며 한국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한인 이민을 보내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간청했다. 당시 한국은 일본 보호국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요청이 받아들여져 한인의 이민은 중단이 되었다. 1965년에 한인 이민길이 열리기 전까지 내내 한인 이민은 중단된 상태였다.
동양 3국(한국,중국,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인들도 대부분이 캘리포니아를 이민 목적지로 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필리핀인들은 동양 3국의 이민과 같은 과정(하와이 노동이민으로 시작)을 거친 바 있고, 또 1898년부터는 식민지로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민수가 많아졌다. 월남인들도 괄목할만할 정도로 다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월남전 피난민으로 입국한 사람들로 미 당국이 캘리포니아를 입국항(入國港)으로 주선했기 때문에 자연적인 귀추라고 할 수 잇다. 캘리포니아의 차이나타운과 재팬타운은 2차대전 전부터 유명하였는데, 재팬타운은 전쟁중 주민들이 강제 수용소에 입소(110,000만명) 하게 돼 방치되었기 때문에 폐허가 됐다. 물론 전후 복구를 했지만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있다.
197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중국인이나 일본인들 이외에 다른 아시아계 소수민족의 집단 거주지가 괄목할만한 정도로 확대 성장되면서 코리아타운, 리틀 사이공, 리틀 마닐라 등이 생기게 됐다. 동양 3국은 역사적인 인연으로, 그리고 동남아 사람들은 기후조건이나 환경에 대한 친밀감이 주는 매력 때문에 캘리포니아가 이민 목적지로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아시아인의 총수는 해당지역의 인구 총수의 19.9%이며, LA의 경우는 11.9%이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는 10명중 거의 2명이, 그리고 LA 지역에서는 10명중 1명꼴로 아시아인이 분포되어 있다는 뜻이다. 새크라멘토에는 13.1%, 샌디에고 지역에는 10.1% 의 아시아인이 정주하고 있다.
언젠가 필자의 집에 한국에서 방문중인 것 같은 어떤 한국인으로부터 전화가 잘못 걸려 왔기에 한국말로“번호가 틀린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더니, 상대방은“잘못 걸린 전화도 한인이구먼요. 한국 사람들이 많긴 많네요”라면서 정중히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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