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일 남가주 잉글우드 공원묘지에서 열린 케네스 카이저 중사 추모식에서 미40사단 장병들이 유족들에게 전달할 성조기를 접고 있다. <연합뉴스>
참화 속에서 싹틔운 사랑
평화 속에서 꽃피운 사랑
“…전쟁은 3년1개월간 계속됐다. 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해 약 450만명에 달했다. 그중 남한의 인명피해는 민간인 약 100만명을 포함한 약 200만명이다. 공산진영의 인명피해는 100만명의 민간인을 포함해 약 250만명으로 추산된다. 군인전사자는 한국군이 22만7,748명, 미군이 3만3,629명, 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해방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확인불가. 전쟁기간 중 한국은 43%의 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완전 파괴됐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발췌>
59년 전 오늘(1950년 6월25일)은 일요일이었다. 그날 새벽 시작된 한국전은 1953년 7월27일(정전협정)까지 이어졌다. 37개월 살육전동안 남북 통틀어 대여섯에 한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뿐만 아니다. 한국지원군과 북한지원군 등 외국군인만 줄잡아 23만명에 이른다.
케네스 카이저 주니어 중사. 남가주 LA 인근 잉글우드 출신의 카이저Jr.는 당시 갓 스무살도 안된 청년이었다. 그는 잉글우드 하이를 졸업하고 입대했다. 일선 전투부대가 아닌 주방위군(제40보병사단) 소속이었으므로 그는 한국전 중반까지는 관전자였다. 초기 3개월동안 속절없이 밀린 전세는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반전됐다. 서울수복에 이은 거침없는 북진, 평양 입성과 압록강 진출. 그러나 1951년 1월, 중공군 개입으로 한국군과 유엔군이 눈앞의 통일을 뒤로 하고 퇴각하면서 카이저Jr. 중사가 배속된 후방부대에도 비상이 걸렸다.
조셉 클릴랜드 장군 휘하의 제40사단은 그해 4월 일본으로 전진배치됐다. 3개 보병연대와 3개 포병대대, 1개 공병대대, 1개 정찰중대로 편성된 제40사단은 거기서 강도높은 훈련을 거친 뒤 1952년 1월 중동부전선 제24사단과 임무교대했다. 인해전술을 앞세운 중공군과 궤멸직전 되살아난 인민군을 상대로 이듬해 7월 휴전 때까지 1년6개월동안 제40사단이 치른 4대전투 중 처음은 중부전선 금성지구전투였다. 5형제 중 막내 카이저 중사는 그곳에서 전사했다. 1952년 1월20일, 실전투입 며칠만이었다. 제40사단 최초의 한국전 전사자이기도 했다. 그의 나이 19세.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전쟁은 계속됐다(정전 때까지 40사단에서만 전사 376명, 실종 10명, 포로 15명). 전쟁 속에서도 언뜻언뜻 평화는 있었다. 카이저 중사가 숨진 그해 여름이 그랬다. 40사단은 경기도 가평에 진을 쳤다. 하나둘 되돌아온 가평사람들은 죽음터를 삶터로 되살리기에 바빴다. 학생들은 배움의 꿈을 다시 지폈다. 그러나 학교가 없었다. 천막 2동으로 학교를 삼았다. 책상도 걸상도 교재도 없었다. 전깃불은 꿈도 못꿨다. 배움의 눈들이 초롱초롱 대신 빛났다.
천막학교 수업풍경은 40사단에 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클릴랜드 장군은 솔선수범 금일봉을 내놓았다. 1만5,000 장병들은 2달러씩 내놓았다. 목재 교사동(교실 10칸)과 강당 1동이 뚝딱 만들어졌다.
가평사람들은 감읍했다. 빈손뿐인 그들은 학교이름에라도 40사단의 흔적을 새겨놓자 했다. 클릴랜드 장군은 맨처음 잃은 부하 카이저 중사를 떠올렸다. 영어에 서툰 가평사람들 입에서 카이저는 가이사가 됐다. 가평가이사중학교. 아직 전쟁중인 1953년 1월13일, 이 학교는 그렇게 탄생했다. 이듬해 1월 가평가이사고등학교로 바뀌었다.
1973년3월 직제개편에 따라 학교이름(가평중고등학교)에서 가이사는 빠졌다(현재는 가평고등학교). 그의 혼은 이어져 2008년2월 교내에 가이사기념관이 생겼다. 1954년 6월 LA로 철수한 40사단도 가이사학교를 잊지 않았다. 사령부에 가이사전시관을 차렸다. 그곳에는 가평학생들이 보내온 감사편지와 감사엽서, 선물들이 놓여있어 전쟁 속에 맺어진 평화로운 인연을 증거한다. 해마다 2,000달러가량씩 모아 장학금으로 전달한다. 클릴랜드 장군의 유언에 따라 그의 미망인은 2002년 작고할 때까지 매년 장학금 모금에 동참했다.
미 제40사단, 클릴랜드 장군, 카이저 중사, 가평고…. 반세기를 훌쩍 넘은 아름다운 인연이 더욱 살갑도록 바라지역할을 하는 인물이 또 있다. 심호명 한국밝은사회중앙클럽 부총재 겸 서울중앙클럽 회장이다. 그는 칠순을 바라보는 성공한 기업인(제주물산 대표이사, 상양흥업 대표이사 등)이다. 대학 등 곳곳에 통큰기부와 사회를 맑게 하는 각종활동으로 여러차례 매스컴을 타기는 했지만 40사단이나 가평고와 직접연관은 없다. 그런 그가 수소문 끝에 미국까지 건너와 카이저 중사의 묘역을 찾아내고 가족들을 위로하는가 하면 40사단 사단장과 참모들에게 보은의 식사대접을 하는 등 팔을 걷어붙이고 있다. 예비역장성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는 밝은사회클럽에서 사연을 들은 뒤,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하고 오늘의 자신이 있게 한 이들에 대한 보은활동에 열성을 기울이게 됐다고 한다.
지난달 3일, 잉글우드시 공원묘지에서 카이저 중사 유족들과 40사단 장병들, 재미한국전용사들, 한영만 교장과 제1회 졸업생 김홍배씨 등 가평고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열렸다. 이 행사에 참석한 뒤 심 회장은 김종헌 예비역준장과 함께 샌호아킨 국립묘지를 방문, 한국전 참전용사들 묘역에 헌화하고 묵념을 올렸다. 심 회장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메모리얼데이를 전후해 40사단과 샌호아킨 국립묘지 등을 계속 찾아올 예정이다.
내년에는 새로운 보은이벤트가 둘 추가된다. 하나는 클릴랜드 장군의 묘역을 알아내 추모식을 올려주는 일이다. 향군묘지나 국공립묘지가 아닌 가족묘역에 묻힌데다 미망인 작고 등으로 잠시 끊긴 장군과의 인연을 영원히 되살리기 위해 심 회장은 북가주에 사는 고교(성남고) 후배에게 장군의 묘지 찾기를 신신당부했다. 또하나는 제40사단 전현 사단장들을 한데 초청해 성대한 보은파티를 열어주는 일이다. 24일 현재, 생존사단장들 중 두세명 빼고 소재가 거의 파악됐다.
한국전은 내년 오늘, 발발 60주년을 맞는다. 미40사단 사람들, 가평고 사람들, 심호명 회장 등은 올해 이맘때가 가기도 전에 내년 이맘때 다시 만남을 손꼽아 기다린다. 한국전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들 뿐이랴. ‘그밖의 사람들’은 더러 한국전을 ‘잊혀진 전쟁’이라 부른다.
<정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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