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섬 곳곳에 전쟁흔적, 그날의 절규 아직도 들리는듯
한국인 위령 평화탑 건립
남양군도의 한 섬이었던 사이판은 태평양 전쟁(1937-1945년)의 깊은 상흔이 서린 곳이다.
사이판에는 1944년 당시 처참했던 태평양 전쟁 상황을 알려주는 여러 유적이 남아 있다. 이러한 전투의 현장을 찾아갔을때 숨이 끊어져가는 병사들의 마지막 절규가 들리는 듯 했다. 특히 일제치하에 있던 한민족은 징용과 징병, 정신대라는 명목으로 태평양의 여러 섬으로 끌려가 고된 삶에 시달리다가 망향의 한을 안고 죽어갔으니 슬픈 역사라 아니할 수 없다.
사이판 북부에는 이렇게 억울하게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평양 한국인 위령 평화탑’이 서 있다. 또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미군에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한 일본인들의 자살절벽과 만세절벽, 일본군 최후 사령부등이 남아 있다. 사이판 북부 마피산에 서 있는 ‘태평양 한국인 위령 평화탑’은 한국이 주권을 일본에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나와 처참하게 혹사당하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1981년에 건립됐다. 해외희생 동포추념 사업회(회장 이용택)가 건립한 이 비문에는 당시 200여만명이 태평양 전쟁으로 희생된 것으로 적고 있다. 그 당시 한국의 인구가 2천만명이었으니 한인들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케 했다.
또 평화탑 옆에는 ‘가신님을 그리워’ 제목의 돌탑이 2006년 3월 1일자로 세워져 있다. 한국사람 김동길이 썼다고 적힌 비문에는 ‘막막한 태평양의 외딴 섬에서 머나먼 고향하늘 바라보면서 망향의 슬픈 가슴 어루만지다 처량하게 가신님을 기억하는가. 몸쓸 전쟁 고된 삶에 시달리다가 여기서 숨거두신 우리 님들의 피맺힌 원한을 헤아리면서’라고 기록,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시게 만들었다. 이종혁 박사가 보내 준 김동명 시인의 ‘사이판’ 제목의 시(1954년 시집 ‘진주만’ 수록)에도 ‘단애에 기어 올라 머리 빗는 여인들, 소스라쳐 몸을 날리니 분분한 낙화로다. 사이판의 옛이야기는 수궁에 무르란다’면서 전쟁 막바지에 사이판의 바다에 몸을 던져 숨져간 절박한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 사이판 북부에는 1944년 미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감행하자 수백명의 일본군 병사와 주민들이 항복을 거부하며 해발 249m의 마피산 정상의 서쪽절벽에 올라가 자살한 ‘자살절벽’이 있다. 지금도 가끔 이곳에서 유골이 발견된다고 한다. 그리고 사이판 최북단 해안에는 80m 높이의 만세절벽도 있다. 미군이 1944년 7월 7일 마지막 공격을 하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없었던 일본인들이 천황의 명령에 따라 포로가 되지 않기 위해 절벽아래의 바다로 뛰어내렸다. 그들이 바다로 뛰어내리면서 ‘천황 만세’라고 외쳐 ‘만세절벽’이라 부르고 있다. 이 당시 미군에 투항하는 것은 조국에 대한 배반으로 여겨 많은 민간인들도 차례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렇게 죽어간 혼을 달래기 위해 일본인들도 전몰자 위령비를 건립, 추모하고 있으며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고 현지 안내원이 말했다.
한국인 위령탑 바로 옆에는 1944년 6월 15일 미군의 사이판 상륙 이후 북쪽으로 쫓기던 일본군 최후의 사령부 진지가 있다. 천연동굴을 이용한 이 사령부 진지는 마치 햄버거 모양처럼 기묘하게 생긴 바위 뒤쪽에 위장되어 외부에서는 쉽게 발견할 수 없다. 또 동굴과 맞대어 뒤쪽에 일본군 사령부가 지휘본부로 사용했던 콘크리트 벙커가 있다. 벙커 콘크리트 한쪽 벽면이 미군 폭격으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어 처절했던 당시를 보여주고 있었다. 현재 사이판 정부는 이곳 진지 앞에 탱크, 각종 대포 및 어뢰 등을 모아놓아 당시의 전쟁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또 최후사령부 주변에는 사이판 최후의 격전지로 전몰자를 위한 위령비와 탑이 서 있다.
1944년 사이판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은 군인만이 아니다. 사탕수수 농사를 위해 오키나와 사람 약 9,500여명이 이주해와 거주했다. 이 당시 전투로 사이판에 살던 일본인 2만2,000여명 중 약 1만5,000여명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태평양 전쟁에 참전 후 실록 대하소설 ‘태평양 전쟁(한림출판사 1969년 발행, 5권)’을 쓴 이호원씨는 사이판에서의 전쟁을 ‘사이판의 옥쇄’라고 표현, 처절했던 전쟁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사이판에 전쟁의 참화를 안겨준 태평양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은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이 중화민국을 침략함으로써 시작됐다. 1941년 미국이 일본에 경제제재와 석유금수 조치를 취하자 이에 반발, 일본이 1941년 12월 진주만을 공격하자 미국이 참전했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해전 승리를 기반으로 1944년 사이판에 상륙한다. 태평양에 항공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B-29등으로 일본내 도시를 폭격했다. 1945년 8월 6일 및 8월 9일에 히로시마 및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이 8월 15일에 항복, 8년여에 걸친 태평양 전쟁은 종결되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원자폭탄을 탑재한 B-29가 출격한 곳은 사이판에서 약 5km 떨어진 티니안(TINIAN)으로 세계사에 그 이름을 남기고 있다. 전쟁의 참화를 이겨낸 티니안은 NGP(Neo Goldwings Paradise Co., 회장 현명인)가 서태평양 최대의 종합리조트 사업을 추진하는 등,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손수락 기자> sooraks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