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뒤 환갑 다 돼 한의사 새출발
중국으로 몽골로 보은의 의료사역
국제한의대 학장 맡아 보너스보람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았으니 남을 돕고 봉사하며 갚아야죠”
1960년대 후반, 충남 공주 어느 마을. 아버지는 그곳에서 수십년째 한의원을 했다. 휴일도 밤낮도 없었다. 늘 한복을 차려입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이웃 겸 손님 겸 환자들을 돌봤다. 집에 누가 산기가 있다며 꼭두새벽에 그 한약방 문을 두드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버지는 자다가도 일어나 출산을 돕는 약을 지어주곤 했다.
1967년, 경희대에 처음 6년제 한의대가 생겼다. 대전고에 다니던 아들은 때마침 3학년. 아버지는 아들 또한 한의사가 되기를 원했다. 아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의 뜻을 댓바람에 거스를 수는 없었다. 시험을 봤다. 덜컥 붙었다. 아버지는 흐뭇했다. 아들은 고민했다. 이러다 진짜 한의사 되는 것 아닌가. 생각다 못한 아들은 면접날이 다가오자 눈 딱 감고 일을 저질렀다. 가출 1주일. 난생처음 불효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던가. 아버지는 손을 들었다. 귀가한 아들은 다시 시험을 쳐 이듬 해 연세대 상대에 들어갔다.
“세시고 네시고 새벽에도 문 두드리면 일어나 약 지어줘야 되고, 명절 때 제일 바쁘고, 그게 그렇게 싫더라고요…아버님이 평생 한복만 입고 책상다리를 하시고, 엄두가 안나더라고요.”
아버지는 그때껏 그랬던 대로 늘 그곳에서 한의사 외길을 걸었다, 일제하 16살 때부터 10여년 전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뜰 때까지 무려 68년동안. 아들은 스스로 택한 경영학도의 새 길을 착실히 걸었다. 아들은 졸업후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주로 국제부문에서 근무했다. 1978년 미국에 주재원으로 파견, 삼성전자 LA지사와 시카고 현지법인 창설 멤버로, LA 지사장 등 삼성전자의 글로벌전선 일선에서 뛰었다. “1991년 이종문 회장님과 선이 닿으면서” 회사도 옮겼다. 북가주에 새 삶터를 튼 것도 그때다. 새 직장에서 10년 근무 뒤 은퇴.
어느덧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아들은 2003년, 한의대(서니베일 UEWM)에 입학했다. 3년 만학 끝에 한의사가 됐다(2006년). 아버지의 권유를 뿌리치고 한의사 싫다며 한의대 면접날 가출을 감행한 때로부터 40년만에, 내내 다른 길을 걸었다가 새삼 누구 눈치 볼 것도 없는 은퇴기에 사서 공부고생을 해가며 한의사가 된 주인공은 임마누엘장로교회(담임 손원배 목사)의 김용태 집사다. 무엇이 그를 돌고돌아 그길로 가게 했을까.
“김종수 장로님이 중국에 선교사역을 가시면서 침을 배워서 중국으로 들어오라 그러시더라고요, 저도 은퇴하고 선교를 가려고 하던 참이고 해서요.” 국제한의대 한국어클래스 학장직을 겸하고 있는 김 집사는 잔잔한 미소를 곁들이며 가출의 추억을 더듬은 뒤 “(지금 한의사가 된 것을) 아버님께서 아신다면 좋아하시겠지요”라고 덧대었다. 그뿐일까. ‘한의사가 된 것’ 자체보다 ‘한의사가 된 뜻’이 한결 더 뭉툭하다.
“돌아보니 참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갚아야 되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자식들도 다 잘 자라줬고, 모든 게 감사하잖아요. 크리스찬 입장으로 하나님 은혜 가운데 60여년 잘 살아왔고요. 받은 게 많은데 이제 돌려줘야 되지 않겠느냐, 그런 거죠. 리타이어하신 분들 같으면 저를 봐서도 상당히 활력이 생기지 않겠어요? 주는 거에서, 남을 도와주고 하는 데서 진정한 보람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학교 다니시는 분에 목사님이 한분 계신데 그분도 말씀사역에다 전문사역을 하게 되면 좋을 것 같다고 그러세요.”
김 집사는 임마누엘장로교회의 해외선교사역 내력(중국 몽골 캄보디아 베트남등지에서의 선교사역과 의료사역, 멕시코에서의 건축사역 등등)과 봉사자들의 노력을 소개하면서 거듭 ‘봉사의 보람’을 얹었다. “비행기표 이런 걸 다 제 돈 내서 가는데도 열에 일곱여덟은 갔던 사람들이 또 가요. 한번도 쉬지 않고 일해서 휴가를 모았다가 여름 3주일동안 봉사하는 데 다 써요. 그러고도 참 좋아해요.”
김 집사는 올해 7월4일부터 10일까지 1주일동안 몽골에 가 의료사역을 펼쳤다. 석정일 목사와 한의사인 박 권사 등 모두 10명이 함께했다. “다른 분들은 6월21일에 나가서 중국사역을 하고 몽골로 갔는데 저는 학교일 때문에 늦게 합류해 1주일밖에 못했어요.” 말이 3주일이지 족히 3개월 공사다. 4월초부터 1주일에 두 번씩 모여 준비하고 찬양댄스를 연습하고 기도하고 등등.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차로 2시간쯤 떨어진 보르네르(갈색호수란 뜻)에서 교회에 침상 6개를 늘어놓아 간이진료소를 차려놓고 그곳 주민들의 건강을 돌봤다. 당뇨와 혈압을 체크하는 것은 기본이고 허리 무릎 등 관절이나 근육이 아픈 이들에게 침을 놔주고 마사지를 해줬다. “해발 1,500미터 고지대인데다가 육식을 많이 하고 말을 자주 타니까 고혈압 환자가 많고 무릎병과 두통 환자들이 많아요. 단순한 생활이고 대개 노동이 힘들어서 그렇지 신경통 같은 병은 거의 없어요. 그러니 침을 놓고 릴렉스시켜주면 금방 효과가 나타나요, 거의 기적처럼.”
기적 같은 일은 또 있다. “올해까지 세차례 의료사역을 다니면서 한 육칠백명 침을 놔준 것 같아요. 침 그게 참 조심스러운 거잖아요. 그런데 단 한번도 무슨 문제가 없었어요. 다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서 돌봐주시고 해서…”
봉사의 환경은 녹록치 않았다. 변변한 숙소가 없어 마침 방학을 맞아 비어있는 유치원을 호텔로 썼다. 남녀 5명씩 나눠 유치원 교실에서 잤다. 아무리 오지라고 해도 물사정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7,000명이 사는 곳에 지하수는 1개뿐. 때문에 일행은 티슈나 타월에 물을 조금 적셔 쓱쓱 문지르는 것으로 세수를 대신했다. 끼니는 주로 김치찌개와 라면 등으로 때웠다. 그래도 “작년에 어깨에 침을 맞고 1년동안 잘 지냈다”고 감사하며 또 몸을 맡기는 그들을 대하면서 일행은 뿌듯한 보람을 다시금 한아름씩 안았다.
요즘 그는 새로 맡은 한의대 강좌 준비 등으로 바쁘다. 집사에서 학장으로 되돌아온 그가 몽골에서의 국경없는 봉사로 밀린 업무처리에 바쁜 사이에도 부인 김진예 권사는 매주 이틀씩 양로병원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장성한 1남2녀 자녀들이 모두 외지(시카고, 타코마, 샌디에고)에 살아 쿠퍼티노에서 단촐하게 살고 있는 김 학장 부부는 다 환갑이 지났다. 봉사에는 국경만 없는 게 아니다. 나이도 없다.
<정태수 기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