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 일에 분주한 하루를 보낸 후 저녁 늦게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라는 제목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 분이 얼마 전 폐렴으로 입원했을 때 돌아가실 것 같은 예감이 든다는 말을 아내에게 했었다. 그런데 막상 서거 소식에 접하고 보니 그 말이 빌미가 된 것도 같아 공연히 송구스럽다.
서거 소식을 듣고 서가에 꽂혀 있는 ‘민족의 한을 안고’라는 책을 꺼냈다. 1983년 12월에 출판된 것으로 당시 ‘슨상님’이라 애칭되던 김대중 선생의 옥중서신이다. 전두환 정권에 의하여 사형선고를 받고 언제 집행될지 모르는 운명을 안고 감옥생활을 하던 때에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책이다.
그가 마침내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게 되었고 1984년 4월22일(주일) 오후 2시 올림픽 가에 있는 영빈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이정근 목사님이시죠? 김대중 선생 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인데요,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습니다.”
그런 전화가 걸려 왔다. 출판기념회에서 기도 순서를 맡아 달라는 요청이었다. 주일예배로 분주할 것을 알면서도 기도 순서는 40대 초였던 나에게 부탁하기로 준비위원회에서 합의했다고 했다. 그 순간 혹시 한국에 남아 있는 가족이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개의하지 않고 수락했다. 그런 연유로 ‘선생님’ 옆 자리에 앉는 영광을 차지했으며 그 분의 서명이 들어 있는 그 책을 선물로 간직하게 되었다.
그 행사의 연장으로 목회자들과의 간담회를 주선했었다. 윌셔 가에 있는 하이아트 호텔(지금의 윌셔 래디슨 호텔) 2충 식당이었다. 15명 정도의 목회자들과 두 시간에 걸친 간담회에서 김 전 대통령은 한국 역사의 미래를 기독교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설명했다.
그 때까지 우리는 권모술수가 능란한 정치인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는데 막상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의 기독교와 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해방의 신학,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샤르댕의 오메가 포인트 등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는 것이었다. 현대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목회자들의 귀로 들을 때 결코 수박 겉핥기로 아는 것이 아니었다.
그 후 그가 대통령이 되고 햇볕정책을 실천해 가는 과정에서 많은 저항도 있었다. 아직도 햇볕정책은 노벨평화상을 타기 위한 전략이었으며 그로 인하여 북한 퍼주기 때문에 오늘날 북한이 핵무장 국가가 되었다는 비판이다.
그것이 상당부분 사실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햇볕정책을 이미 옥중서신에서도 자세히 밝힌 바 있다. 그것은 평화 공존, 평화 교류, 평화 통일 3단계 통일방안이라고 천명했다. 이 같은 평화통일론은 그간 군사정권에 의하여 친북통일론으로 매도되어 왔다.
그러나 햇볕정책은 미래형 통일론으로서의 가치가 더 크다고 평가해야 한다.
비록 그의 햇볕정책에 대하여 ‘이북에는 햇볕, 정적들에게는 폭풍’이라는 비판적 시각은 그대로 유효한 측면이 있고 또 그 이행과정에 있어서 폭풍정책과 함께 사용하지 못한 과오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남북문제에 있어서는 햇볕 정책으로 방향 잡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김 전 대통령은 역사에 큰 발자국을 남겼다. 그리고 그 발자국에는 지방색을 정치에 지나치게 악용한 것 같은 바람직하지 못한 점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것들은 나무가 크면 그늘도 크다는 것으로 이해하여야 될 것이다.
그 분은 목회자들과의 만남에서 이런 간증을 여러 번 했다. 자신이 네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만났는데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영혼이 하나님 품에 안기심으로 다시는 죽음이 없는 나라로 갔다. 그 곳에서도 평화통일과 햇볕정책이 실현되어 한반도에 어린 양과 이리가 함께 풀을 뜯는 영세 평화국이 건설되도록 기도하여 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이정근 / 목사·미주성결대 명예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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